일요일, 늦잠을 자도 좋은 날이다. 이불 속에서 미적거리는 시간마저 달콤한데, 전화 한 통이 날아들었다. 지병과 싸우는 숙부가 위독하다는 연락이었다. 며칠 전에 영양제 맞으러 입원했다고 통화했는데, 날벼락 같은 소식에 당황스러웠다.
서둘러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제발 늦지 않기를 기도했다.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길이 가도 가도 끝없이 멀게 느껴졌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숙부를 마주했다. 태산처럼 큰 어른은 간 곳 없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조그만 노인이 누워 있었다.
"작은아버지, 채현이가 왔어요."
소리쳐 불러도 숙부는 미동도 없었다. 숙부는 내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다. 숙부가 든든히 지키고 있어서 우리는 고향을 잃지 않았다. 아비를 여읜 조카들이 행여나 기죽을세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얼마 전 뵈었을 때 얼굴빛이 맑아 안심했다. 이렇게 급하게 의식을 잃을지 몰랐다. 동화책이 나오면 곧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동화책이 나왔는데, 숙부님께 드리는 사인도 정성 들여서 해두었는데, 숙부는 조카를 위해 활짝 웃어주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석사에 들렀다. 어디에라도 빌고 싶었다. 불자가 아닌 이의 기도라도 간절히 빌면 들어줄 것 같았다. 앙상해진 은행나무 사이를 걸어 내려오는데 서산에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해가 시나브로 산 너머로 사라졌다. 지는 해는 내일이면 다시 떠오를 테지만, 이제 헤어지면 숙부와 나는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숙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숙부의 삶이 멈추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는 여전히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달림과 멈춤, 삶과 죽음은 이토록 극명히 다르다. 삶의 반대말이 죽음이지만 그 거리가 아주 멀지는 않다. 내일일지, 오늘일지, 한 시간 후가 될지 알 수 없다. 예정된 시간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미움도 노여움도 남기지 않을 텐데.
전기통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인편에 소식과 물건을 전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오는 길에 그쪽 안부도 전해왔다. 그처럼 이승과 저승 사이에도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면 좋을 텐데, 저승으로 떠나는 이는 있어도 돌아오는 이는 없다. 숙부님 가시는 길에 내가 펴낸 동화책 한 권 보낸다. 40년 만에 아버지께 가는 연락이다. 코흘리개 막내가 자라 동화작가가 되었다고, 두 분 오랜만에 해후의 술잔 나누시며 크게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오늘이 마지막 하루라면 시기와 질투로 시간을 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하던 아침이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사랑하면서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흔한 말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늦기 전에 사과하고, 용서하고, 사랑의 말을 전하는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일이면 늦을지도 모른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