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상상으로 하는 여행

권기철 화가

권기철 화가
권기철 화가

겨울방학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여행지를 꿈꾸다, 학기가 종료되길 기다려 곧 익명의 섬으로 탈출하던 때가 꼭 지금의 시기다. 넓은 바다를 건너고, 뭉게구름에 몸을 맡기고, 바람이 부는 곳으로 떠다니는 일은 아련한 향수가 되어간다. 여행이라고 하면 이제 내밀한 내 몫의 시간을 채집하는 상상으로 떠다닐 뿐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닉하고 경험하는 일은 힘들다. 세상이 코로나로 잠식돼 바다와 하늘의 세계로 향한 출구는 희미해졌다. 지금의 여행은 이제 상상의 세계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메타버스의 세계로 진입한 걸까, 아니면 초현실의 세계로 전락한 걸까.

붓을 놓고 책을 들었다.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라는 제목, 여행을 마치고 화실로 복귀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책이다. 책등은 닳았고 꼼꼼한 냄새가 낀 책장 사이에는 낙서와 그림들이 가득한 노트가 있다. 그리고 간단한 일본말들이 한글로 적힌 여행지에서 쓴 작업노트다.

"넓은 잎이 낙엽이 돼 땅바닥에 떨어졌다. 작은 잎은 약간의 푸르른 젊음이 남아있다. 뾰족한 소나무 잎은 그대로 겨울을 날 것이다. 넓은 잎이 빨리 떨어진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소나무가 겨울을 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나뭇잎들이 넓고 좁아야 할 이유가 있으리라."

이글을 쓰던 곳은 일본 요코하마의 작은 카페다. 새해가 한 달이 지난 추운 겨울날이었다. 지금 살펴보니 둥둥 가슴이 설렌다. 그때 나는 카페에 앉아 창밖의 무심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낙하하는 플라타너스 잎들의 탈색한 부분들과 크기를 하염없이 관찰하였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간과 속도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배낭에 찔러넣고 낯선 곳을 배회하던 때가 벌써 몇 해 전 겨울이다. 혹한의 바람이 내 몸을 추근거려도 바람이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던 때, 그때는 그랬다. 어두운 일상이 비루하게 나를 옥죄던 시기, 서쪽으로 지는 해를 따라가다 그림자의 잔량을 보면 허무는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질병 같은 것이 어른거려 마침내 여행자는 고독해졌다. 그럼에도 농밀하게 번진 허무와 고독이, 흐르는 눈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밤이면 지쳐 은밀한 몽상에 잡혀 책을 펼치곤 했다. 자간과 행간 사이에 많은 욕망과 욕구가 동시에 녹았다. 혹한의 밤은 많은 것을 감추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정신이 깊이 증폭하고 진화해가도, 그때는 나의 누추한 신발을 온정하게 맬 수 없을 때.

곧 새해가 된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끼고 빨간색 차가 게으른 여행을 가는 꿈을 꾼다. 오늘 미혹한 바람이 휘날리는 작업실에 앉아 인생의 한 나절, 또한 코로나를 만난 한 시절을 담담한 마음으로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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