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사극이 부활했다. 5년 만이다. 그간 시청자들의 적지 않은 요구가 계속 이어져 왔지만 이뤄지지 못했던 건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그렇게 우려와 기대 속에 부활한 '태종 이방원'은 과연 어떤 성취를 보이고 있을까.
◆대하사극, 한계에도 부활한 까닭
지난 11일 KBS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이 첫 방송됐다. 진짜 역사를 담은 정통사극의 필요성은 공영방송 KBS에 지속적으로 요구된 바 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광고 매출이 급감하며 지상파 방송사들이 모두 재정적인 문제를 겪으면서, 지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일순위로 드라마 제작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KBS1 대하사극은 제작이 보류될 수밖에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제작비는 수백억원이 들어갈 정도로 만만찮은데, 거둘 수 있는 결과는 소소해 적자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한때 KBS 대하사극은 '태조 왕건'같은 사극이 최고 시청률 60%를 찍었던 시대가 있었지만, 갈수록 시청률도 추락했고 화제성도 떨어졌다.
시청률 20% 찍는 게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진 게 지금의 지상파 드라마의 현실이 되었고, 그나마 극성이 강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사극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간 쏟아져나온 퓨전사극들은 정통사극(사실 KBS 대하사극도 갈수록 퓨전화됐지만)을 밋밋하게 만들었다. 자극적이고 얼얼한 퓨전에 맛들인 시청자들은 정통사극을 심심하게 느낄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럼에도 KBS가 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대하사극을 부활시킨 건, 바로 그런 퓨전사극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 때문이었다. 퓨전사극의 범람이 진짜 역사를 지워버린다는 비판들이 제기됐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역사를 그저 시공간으로만 활용한 사극들이 멜로, 판타지로까지 가면서 정반대로 사극에서 역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들도 등장했다.
2014년 정현민 작가의 '정도전'이 정통사극의 기치를 내걸고 등장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건 그런 변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물론 그 후에도 퓨전사극들은 계속 등장했지만, 역사보다는 상상력으로만 질주하던 사극의 경향은 조금씩 역사와 상상력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 문화공정같은 외부적 상황들이 '역사왜곡'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면서 '조선구마사'같은 사극은 논란 끝에 2회 만에 폐지되는 사태까지 겪었다. 그렇다고 대중들이 모두 정통사극만 원한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최근 다시 사극의 전성시대를 만든 '홍천기', '연모', '옷소매 붉은 끝동'같은 사극들처럼 멜로와 퓨전은 여전히 인기다.
하지만 퓨전사극들이라도 역사를 어느 정도 활용한다면 거기에 맞는 책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겼고, 그래서 드라마가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는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 보이게 됐다. 반대급부로 진짜 역사를 담는 정통사극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KBS 대하사극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대중정서의 변화 속에서 부활했다 볼 수 있다.

◆왜 하필 '태종 이방원'인가
그런데 왜 하필 다른 인물도 아니고 KBS 대하사극은 태종 이방원으로 돌아오게 됐을까. 애초에는 태종과 정조, 그리고 고려 현종이 소재의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태종과 정조가 유력하다 여겨졌는데, 결국 태종을 선택한 건 그간 많은 사극이 소재로 여말선초(麗末鮮初·고려말 조선초)를 다뤘을 때 훨씬 좋은 성과들이 나왔던 사실과 무관할 수 없을 것 같다.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바 있고, '정도전'(2014), '육룡이 나르샤'(2015), '나의 나라'(2019)도 이 시기를 다루는 것만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즉 여말선초는 사극 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꾸준히 반복되어도 매력적인 시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여말선초가 이토록 사극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새 나라를 세운다'는 조선 건국의 역사 자체가 그 어떤 시대의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새 나라'에 대한 관심사는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대선 시기에 맞춰진 듯 기획되어 방영되는 사극의 경우, 그 사극 속 인물들과 대권 후보들의 리더십이 대중들의 비교대상이 되곤 했다.

'태종 이방원'도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마침 내년 3월에 있을 대선과 맞물려 있다. 하필이면 이방원이라는 인물을 선택한 것이 이 시대의 대중들이 원하는 정치인상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 있을까.
필자의 사견이 섞인 해석이지만, 이방원을 사극의 인물로 세운 데는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보다 현실적인 리더십이 이 시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태종 이방원' 첫 회에 이방원(주상욱)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까지 다 죽였던 자신을 '괴물'이라 칭하며 세종에게 하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니 이젠 너의 차례다. 세자. 성군이 되거라. 네가 성군이 된다면 나도 사람이 될 것이고, 네가 그렇지 못하면 나는 괴물로 남을 것이다."
즉 지금은 피묻히는 현실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지만, 그것은 그 뒤를 잇는 정권에 의해 서로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것. 여말선초 혼돈의 역사를 가져왔지만, 현재의 정국을 투영시킨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익숙한 스토리, 어색한 CG
물론 '태종 이방원'은 이미 여러차례 소재로 등장해 익숙할 대로 익숙한 실제 역사가 가장 큰 스포일러다.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도 '형제의 난'은 잘 알고 있고, 적어도 '용의 눈물' 같은 사극을 기억한다. 그러니 이방원이 이성계와는 달리 어떤 선택들을 하고 그 결과 조선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루지만, 동시에 수많은 이가 피를 흘리는 희생을 치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태종 이방원' 시청자 게시판을 들여다보면 이 사극 속 이방원이 너무 밋밋하다는 평가들이 눈에 띤다. 그건 아마도 너무나 많이 봤던 여러 사극 속(특히 퓨전사극 속) 이방원의 모습들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되곤 했던 모습과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게다.
이것은 정통사극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이미 익숙한 역사지만, 그걸 과도하게 벗어나 극화할 수 없는 한계. 이방원은 그래서 영웅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인간적 고뇌와 약점을 가진 역사적 인물로 다뤄진다. 어딘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약해보이는 이방원이지만,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는 냉혹할 정도로 과단성있는 인물의 면모를 보이고, 차츰 야망을 드러내면서 심지어 괴물 같은 선택(형제를 죽이기도 하는)까지 하게 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밑바닥에는 자칫 대업에 실패하면 역모가 되어온 가족이 도륙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영웅화되고 극화되지 않은 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태종 이방원'의 이방원은 퓨전사극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제작비 때문일 수 있지만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전투 장면과 어색한 CG도 OTT 등을 경험하며 한없이 높아진 눈높이를 가진 시청자들을 떠올려보면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음악, 연출 등도 의도된 복고라고 여겨지기보다는 제작비의 부담과 관성에 의한 것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태종 이방원'이 존재 가치를 지니는 건 공영방송 KBS라는 플랫폼에서 정사를 제대로 다루는 역사극의 필요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퓨전화되고 나아가 판타지화되기까지 하는 사극의 흐름을 두고 볼 때, 대단한 대중성을 갖지 못했다고 해도 정통 역사를 담는 사극으로서의 KBS 대하사극은 더더욱 요구되는 면이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상상력의 여지를 허용함으로써 드라마가 갖는 재미 요소까지 채워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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