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읽기] 박승무(1893-1980), ‘설경’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담채, 13.5×44.3㎝, 개인 소장
비단에 담채, 13.5×44.3㎝, 개인 소장

설경을 즐겨 그리고 잘 그린 화가 심향 박승무는 1913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해 안중식, 조석진 등으로부터 옛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을 배운 동양화 1세대이다. 1930년대 중반까지 젊은 시절에는 현장을 사생한 산수화를 그리다 중년 이후 고전적 형식미 위주의 전통산수로 되돌아갔다. 유행을 억지로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산수화에서 하늘과 물은 종이나 비단의 원 바탕을 그대로 남겨두는 부분인데, 설경에서는 반대가 된다. 희게 눈 쌓인 산과 지붕과 언덕이 붓을 대지 않고 그대로 남기는 부분이 되고, 하늘과 물에 먹을 올린다. 윤곽선으로 형태를 드러낸 설산 위의 하늘은 연한 먹으로 맑게 선염했고, 산 아래에는 시내를 끼고 있는 마을이 있다. 화면 가장 앞 쪽에는 겨울나무가 좌우 언덕에 무성하다. 박승무의 '설경'은 차갑고 어둡기보다 정결하고 푸근한 겨울 풍경이다.

화제는 '어대흥사(於大興寺) 여창하(旅窓下) 위(爲) 성재인형(誠齋仁兄) 아촉(雅囑) 심향(深香)'이다. 여행 중 대흥사에 머물 때 성재라는 호를 쓰는 분의 부탁으로 그에게 그려 준 작품이다. 박승무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대전에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2005년 대전에서 심향선양위원회가 발족돼 박승무는 지역 1호 화가로 대접받으며 현창사업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당대의 화가를 대가로 호명하며 초대한 기획전은 1940년 5월 28일부터 4일간 경성부민관 3층에서 열린 '조선미술관 10주년기념 십대가산수풍경화전'이 처음일 것이다. 선정된 10대가는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박승무 ▷이한복 ▷이상범 ▷최우석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 등이다.

우리나라 미술전문기자의 선구인 이구열(1932-2020)은 이 선례를 활용해 30여년 후인 1971년 당시 생존해 계신 여섯 분의 초대전을 기획해 이후 '6대가'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 전람회를 앞두고 이구열은 '6대가 화실 순회방문기'를 당시 근무하던 '서울신문'에 실었다. 그때 기자와 만난 79세의 박승무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서울을 멀리하니 그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통심정(通心情)할 만한 사람도 없어. 보통 상식으로라도 예술을 알아야 대화도 되고, 서로 풍부한 기색으로 담소화락(談笑和樂)할 수 있는 정취가 생기는 건데, 요새는 차 한 잔을 먹어도 실리주의니 말도 안 통하고 사는 재미도 갈수록 없어지는군. 예술과 정서를 아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이 윤택해지는 건데, 모두가 유감스러운 일이지.

동지와 애호가를 찾기 힘든 지역에서 외롭게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던 그였기에 이 초대전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화가와 애호가, 기획자는 미술을 들어 올리는 세 기둥이다. 지역에서 더욱 귀한 존재가 화가와 애호가를 접속시켜 이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미술기획자일 것이다.

미술사 연구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