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일본 관동군의 토벌대가 계곡으로 들어섰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한 길잡이는 흰옷을 입은 즉 한족(韓族) 노인이었다. 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갑자기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일곱 고개를 넘어간다/…'는 노래로 뒤에 일본 토벌대 일곱 놈이 있음을 알렸다. 토벌대들은 '아, 속았구나!'하고 대장이 군도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토벌대의 위치를 알게 된 독립군들의 총성이 거세게 불을 내뿜었다.…토벌대는 순식간에 몰살되었다. 승리를 확인한 독립군들은…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감싸 안았다.…노인은 이미 절명한 뒤였다. 노인은 그렇게 아리랑을 불러 토벌대를 몰살시키고 세상을 떠났다. 독립군들은 노인을 둘러싸고 눈물로 아리랑을 불렀다. 노인이 못다 부른 그 아리랑을…."
1920년 중국 간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때 한인 동포들은 일제 탄압 속에도 독립군을 지원했고, 아리랑 가락에 토벌대 위치나 숫자 등 특별한 정보나 소식을 담아 암호처럼 전달했다. 일본군도 한국인 누구나 부르는 아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일본군을 무찌른 독립 전쟁에서도 이런 아리랑의 사연이 깃든 사실은 연구 자료(이은영, 이정면, 황윤복)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 이야기를 종합하면 대략 위와 같았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투쟁은 때와 장소,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낯선 간도땅 한족 노인에 이르기까지 세계로 흩어진 이산(離散) 동포 모두 같았다. 이런 눈물겨운 독립 전쟁을 알았을까. 1929년 일본에 들린 인도 시인 타고르는 한국 방문 요청에 병으로 응하지 못하자 글로서 마음을 대신했으니 오늘날 전하는 '동방의 등불'이다.

◆'동방의 등불' 한국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빛나던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 번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東方)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3월 28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달된 영어 '쪽지 글'은 주요한의 번역으로 4월 2일 '조선에 부탁'이라는 제목의 4행시로 실렸고 이튿날(3일) 6행의 원문(In the golden age of Asia/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And that lamp is waiting/to be lighted once again/For the illumination/in the East)도 소개됐다.
타고르는 앞서 1916년 5월 첫 일본 방문 때, 한국 유학생(진학문)의 한국 방문 요청에 '시일이 없어 여의치 못하게 된 것을 대단유감으로' 여기고 대신 자신의 시 '패자의 노래'(The Song of Defeated)를 전했다. 당시 일본에서 『청춘』을 발간하던 최남선은 아시아인 최초로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의 시를 1917년 『청춘』 11월호에 '쫏긴 이의 노래'로 실었다.
타고르는 또 1916년 한국의 『신문계(新文界)』 잡지에 '세계적 대시인-철인-종교가 타꼬아 선생'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후 독립운동가 한용운 스님이 1918년 펴낸 『유심(唯心)』을 통해 타고르 글과 이야기가 전파했다. 특히 한용운 스님은 자신의 유일한 시집인 『님의 침묵』에도 '타골의 시를 읽고'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특히 타고르는 1920년대 잡지와 문인들이 그의 시를 알리고 조명할 만큼 당시 외국 시인으로 부각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 1929년 4월과 6월 『동아일보』가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실었으니 식민지 한국인의 마음은 오늘날의 비판과 달리 특별했으리라.

◆인류 자산이 된 국채보상운동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의 연구자료(김영철)에 따르면 1905~1909년 중국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있었다. 1905년 북경에서 『경회일보』 주도의 외채상환 국민기부운동과 1907년 북경과 천진에서의 같은 운동이다. 또 1909년 '천진상회' 왕죽림(王竹林) 사장의 '국채보상취지문'과 '국채보상요강초안' 발표와 민간 모금 및 세금 징수를 통한 국채상환 시도 역시 같은 사례이다. 그러나 한국 국채보상운동과 달리, 이들 민간운동은 전국으로 퍼지지 못했고, 정부도 경계하거나 때로는 대립해 결과는 성공하지 못했다.
멕시코에서는 1938년 외국계 석유회사의 국유화 조치에 따른 이들 회사에 대한 채무 즉 외채문제가 생기자 이를 갚으려 대통령 부부가 나서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없이 동참하면서 '종교 축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성들은 예물 반지, 팔찌, 귀걸이를 내놓았고 각종 헌납품이 모였으며 종교 신자들과 노조도 동참했다.
베트남에서는 1945년 8월 프랑스 침략에 맞서기 위한 '황금주'(Gold Week) 운동이 일어나 전국의 민간 차원에서 베트남인들이 '황금주' 1주일 동안 금과 은, 보석, 쌀, 재산을 내놓았다. 따라서 '황금주' 기간에 전국에서 약 2천만 동(2016년 현재 가치 2조 동 추산)의 돈과 370kg의 금을 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 해외 세 사례와 달리 한국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침략에 맞서 전국에 퍼져 온 국민이 나서는 등 그 가치와 의의가 남랐다. 이는 빚갚기 운동 100주년인 2017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인류 공유 자산으로 인정받은 데서도 증명됐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항일 투쟁
한국인의 항일 투쟁을 세계인은 평가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중국인의 찬사가 쏟아졌고, 일본 언론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또 친일파 부호 처단 등에 나선 비밀무장단체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이 1921년 대구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자 해외에서도 그를 기렸다고 한다.
일제 잔혹한 탄압 속 평화시위로 이뤄진 1919년 3·1만세운동은 외국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일제 군경의 평화시위 탄압은 일본 내 지식인과 한국 방문 종교계의 비판을 샀고, 중국 5·4운동 등 해외 민중 시위의 선례가 됐다. 특히 1923년 일본 동경(이봉창)과 상해(윤봉길)에서 터진 폭탄투척 사건은 세계에 전파됐고 일제 침탈에 시달리던 중국 지도자 및 지식인의 한국 지지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냈다.

당시 중국 정부 지도자인 장개석 주석은 "중국 100만 대군이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찬사를 보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영국과 한국의 광복군이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서 펼친 대일(對日) 합동작전인 인면전구(印緬戰區)공작대 전투도 연합국의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일제 때 '동방의 등불'처럼 세계 평화와 자유 쟁취를 위한 한국인들의 독립전쟁의 투쟁 흔적과 기록 자료는 넘친다. 이는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약소국의 자유와 독립, 평화와 인류 공영의 절실함을 일깨워주는 자산인 만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독립운동 자산 보고인 대구경북이 나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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