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울은 일본 유학 후 고향인 대구에 정착해 작업하고 있는 젊은 여성 판화가이다. 작가의 판화 작업은 주로 도시의 일상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둔다. 도시는 입방체의 공간효율성이 좋은 공간이 많다는 점에서 이를 상자에 비유하는데 탁월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
네모난 장조림 캔과 닮은 버스, 네모난 창이 뚫려있는 플라스틱 맥주 박스와 닮은 지하철, 도시를 누비는 수많은 택배 상자, 완전한 집의 형태보다 한 칸 상자의 공간(원룸)에서 사는 사람들…. 이러한 모습들은 작가가 일본과 한국에서 보고 살아온 도시의 모습들이다.
김서울 작 '홀로상자일기'는 원래 대구예술발전소 입주 작가 성과전 '유연한 히스테리라' 전에서 발표한 것으로, 일상의 공간과 순간들을 일기와 같이 담담하게 그려낸 30점의 소품에 숫자를 붙여가며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제작과정은 이렇다. 작품을 그리기 위한 종이재료(크래프트타이벡)를 상자모양으로 종이접기해 입체 상자를 만든 후, 다시 그것을 펼쳐 평면으로 되돌린다. 화면 안에 상자 모양은 없지만 상자 공간이 있었던 흔적은 접힌 자국으로 표면에 요철로 남아 있다. 김서울은 이 흔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빈 공간(Hollow Box)을 찍어 요철을 두드러지게 했다. 마치 동전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칠하면 동전의 요철이 종이표면에 드러나게 되는 프로타쥬 기법처럼, 작가는 관객들에게 평면 위에 드러난 접힘 자국을 통해 상자 공간의 실재를 감지하게 했다. 그런 다음 작가는 빈 공간에 일상의 경험 이미지와 생활 속에서 떠올리게 되는 장면들을 드로잉해 그려넣었다.
이제 김서울 판화의 세부 소품을 살펴보자.
홀로상자03에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현관 앞 마스크 걸이가 있다. 흰색 두 장에 까만 색 한 장, 그리고 하얀 운동화 한 쌍이 달랑 놓여 있다. 홀로상자12는 자취방에서 홀로 끼니를 때우면서 먹었던 컵라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홀로상자22는 미처 상자로 만들어지지 못한 모습을 공사장 금줄로 표시되었으며 건물 철거 후의 공터를 구겨진 빈 종이로 표현해 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화면에는 상자로 접혔다가 펼쳐진, 구겨진 형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이 모두는 작가만의 특별한 일상의 장면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자신의 지난 하루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김서울 판화의 '신의 한 수'는 바로 이 화면 속 구겨진 흔적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 도심 속에 어느 공간에서 거주하면서 때로는 의미있게, 때로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의식의 촉각을 곧추세우지 않으면 공허하기 그지없이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서울은 바로 이 점에서 '공간에 대한 욕구' 또는 '사적 공간의 결핍으로 인한 욕구의 전이'를 구겨진 흔적으로 드러내면서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충실히 담아냈다. 따라서 작가에게 상자(구겨진 흔적)는 더 이상 작품의 부수적 배경이 아니라 주제 자체로 부상한다.
대개 판화는 오래된 전통적 매체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김서울의 작품을 보다보면 판화만의 아날로그적인 매력과 판화로 펼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판화작업 중 가장 까다롭다는 동판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온 작가는 어쨌든 코로나19시대를 계기로 '홀로상자'의 경험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교류할 여유를 찾게 됐다.
김서울의 '홀로상자일기' 판화감상은 작가 자신의 일기이면서 동시에 관람하는 우리 모두에게 '나의 상자는 무엇일까'를 소환하게 만드는 우리 모두의 일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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