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남지 않은 새해를 기다리며 다이어리를 주문했다. 모니터 앞에서 이런저런 디자인을 늘어놓고 구경하다, 결국은 몇 년째 쓰고 있는 것과 같은 다이어리를 샀다. 특별한 폼 없이 한바닥 안에 날짜와 요일이 인쇄되어 있어, 그날그날의 업무를 적어 놓기 좋은 업무용 다이어리이다. 그날 해야 할 일을 기록하고, 처리한 일들은 밑줄을 그어 '클리어' 시켜버리는 업무 수첩인 셈이다.
일 년을 돌아보며, 다 쓴 다이어리를 훑어보았다. 서점 업무 외에도 몇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미팅 시간과 시안 컨펌 날짜, 거래업체에 보낼 발주 리스트와 납품 일정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각종 세금납입일과 챙겨야 할 사항들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실행하지 못한 프로젝트,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계획도 적혀 있었지만, 정작 내 삶 속으로 찾아온 갑작스러운 일들과 순간순간 느낀 감정은 적혀 있지 않았다.
올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긴급한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고 함께했던 팀원들과 제주행 비행기를 타며 설렜던 날 ▷친구 아버지의 부음 소식에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내 울며 슬펐던 날 ▷딸아이의 고입시험을 위해 시험장 앞에서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날 ▷지인들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일상의 온기같은 대화 ▷서점 안에서 주고받았던 응원 등. 올 한해 오고 갔던 소중한 일상들인데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되거나 옅어질 텐데, 마지막으로 '일기'라는 것을 썼던 적이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태교를 위해 썼던 열 달 간의 일기가 마지막이었다. 그때의 기록들은 정말 사소했다.
▷생전 먹지 않았던 포도를 매일 아침 두 송이는 먹어야 그날의 갈증의 해소되었다는 이야기 ▷토마토를 실은 트럭이 하도 탐스러워 눈으로만 쫒아가다 꽈당 넘어졌었던 일 ▷때마침 늘 가던 산부인과 간호사 선생님을 만나 무릎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었던 일 ▷직장을 그만두었던 일 ▷편안함과 불안함 속에서 결국 쏟아지는 잠과 타협하며 살았던 이야기 등 이 모든 것이 삶의 일부처럼 살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일기를 통해 그때 느꼈던 감정과 그 흐름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슬픔의 원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기쁨의 순간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나는 어떤 순간들을 사랑했는지, 나의 불안의 씨앗은 무엇인지까지도 적혀 있어 나를 좀 더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몰랐던 나의 이야기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희미해진다. 작은 것일수록 더 그렇다. 결국 매일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잘 살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하루 동안의 일과를 되돌아보며, 나를 보듬는 행위이다. 기록을 기억 속에 맡겨 두고만 있기에는 내가 좀 무책임한 것 같아, 업무 수첩 같은 다이어리 외에 따로 일기장 한 권을 마련했다. '일기장'은 이곳에 마음을 두겠다는 일종의 의식이겠다. 그렇게 첫 장을 열어 다짐의 문장 한 줄을 적는다. 다행히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그 다음 문장을 이었다. 잘 쓰려는 마음보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보자라는 마음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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