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토일드라마 '설강화'는 방영과 동시에 역사왜곡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 대해 제작진은 오해라며 두고 보면 우려가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 '설강화'는 어떨까.
◆어떤 드라마길래
1987년 4월. 남파간첩 임수호(정해인)는 베를린대학 경제학과 대학원생으로 위장한 채 서울로 잠입해 들어온다. 야당 대선주자의 경제브레인인 한이섭 교수를 포섭해 월북하는 것이 그에게 떨어진 지령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안기부가 거액의 돈을 제안해 북한과 함께 한 대선 공작이다. 이른바 '북풍'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
하지만 이런 윗선의 사실을 모른 채 간첩 잡는 일에 혈안인 안기부 요원 이강무(장승조)가 역시 이 공작의 정체를 모른 채 남파된 임수호를 추격하고 곤경에 처한 그는 호수여대 기숙사로 숨어든다. 마침 그와 방팅을 했던 은영로(지수)와 같은 방에서 지내는 고혜령(정신혜), 여정민(김미수), 그리고 윤설희(최희진)는 그가 쫓기는 운동권 학생이라 오인하고 그를 기숙사에 숨겨주고 다친 상처를 치료해준다.
상처를 치료한 후 임수호는 기숙사를 떠나지만, 기숙사 근처 산에 숨겨둔 자금과 무기를 회수해 가려다 우연히 '한번만 봤으면 좋겠다'는 글귀가 적힌 은영로의 종이비행기를 본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혀온 안기부 요원들을 피해 기숙사로 숨어들고 쫓아온 이강무를 제압한 후 기숙사에 있는 이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인다.

즉각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건 '간첩을 대학생이 돕는다'는 내용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붙어 있다. 그 대학생, 즉 은영로는 간첩을 안기부에게 쫓기는 운동권 학생으로 여겨 돕는다는 전제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간첩을 돕는 대학생의 구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당대에 대학생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까지 집행했던 아픈 역사를 경험한 대중들에게는 비록 오해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런 설정 자체가 당시 안기부와 신군부에 변명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라는 우려를 갖게 만들었다. 물론 이건 실제 이 드라마가 당시의 민주화 운동을 폄훼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오인을 만들 우려의 표명이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설강화'가 당대 시대의 비극 속에서 희생된 개인들의 이야기이며, 무엇보다 민주화운동 관련 이야기가 아니라 멜로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남파간첩 임수호와 여대생 은영로의 비극적인 멜로라는 것.
하지만 이 부분은 오히려 이 드라마가 얼마나 시대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하는가를 드러내는 일이 되어버렸다. 직접적인 왜곡만이 왜곡이 아니라, 당대에 분명히 존재했던 민주화운동을 하던 청춘들을 삭제한 채, 시대를 멜로의 배경으로만 쓰려는 의도 자체가 왜곡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보다 치명적인 완성도의 결함
논란이 쏟아져 나오고,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애초의 이런 목소리들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것은 제작진이 말한 것처럼 '오해가 풀려서'라기보다는 드라마의 완성도 자체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비롯된 일이다. 드라마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바로 '폐지'로 가는 흐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대중적 공감도 작용했다.
이미 지난해 초 SBS '조선구마사' 사태를 겪으며 생긴 학습효과다. 역사고증 문제 등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건강한 것이지만, 문제적 작품을 방영 혹은 폐지라는 양극단으로 몰고 가는 건 콘텐츠업계 전체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조선구마사' 사태 이후 사극 혹은 시대극을 쓰는 작가들은 이 사태가 상상 자체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하지만 우려에서 비롯된 이러한 논란을 차치하고 들여다본 '설강화'는 그 완성도만으로도 심각한 결함들을 드러냈다. 그 첫 번째는 매력적인 인물의 부재다. '설강화'의 원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해인이 연기하는 임수호는 멜로의 설렘과 달달함을 매력으로 장착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여대생 기숙사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남파간첩으로서 사실상 테러리스트의 면모를 드러낸다.

멜로의 공식대로라면 그에게 몰입하고 감정이입해야 하지만, 시청자들은 좀체 이런 양면을 드러내는 인물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그것도 1987년이라는 배경 속에서의 '남파간첩'이라는 자각을 갖고 보면 더더욱 그렇다.
임수호와 멜로를 이끌어야 할 상대역인 은영로도 마찬가지다. 특히 여성시청자들이 몰입해야할 이 인물은 현재 여타의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과는 달리 너무나 수동적이고 때론 바보 같은 선택으로 모두를 위기에 빠지게 만드는 '민폐캐릭터'다. 여기에 이런 중요한 역할을 거의 연기 경험이 일천한 아이돌 가수 지수가 연기하고 있어 더더욱 몰입이 어렵다.
두 번째는 시대극에 멜로, 코미디까지 엮은 장르 퓨전에서의 실패다. 사실 시놉시스가 유출되어 논란이 벌어졌을 때부터 시대극이 갖는 무게감과 책임의식을 다시 생각했다면, 이를 단순하게 멜로, 코미디로까지 엮어내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수정되었을 게다.
시대가 갖는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임수호가 은영로와 갈등하면서도 조금씩 드러내는 멜로적 감정은 너무나 엇박자다. 도대체 총을 들이대는 남자와 인질로 붙잡힌 여자가 어떻게 멜로 감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심지어 인질극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일부 인물들을 통해 코미디를 그리려는 자세는 이 작품이 가진 '가벼움'을 드러낸다. 누군가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도 웃길 수 있다면 희화화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대한 책임의식이 완성도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설강화'는 이러한 완성도의 부족과 장르적 부조화 때문에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멜로에 집중해 보려고 하면 정서적 반감을 일으키는 인물들 때문에 몰입이 안되고, 인질극 같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의 관계 진전 자체가 어딘가 병적으로 보인다.
액션과 스릴러에 집중해 보려고 하면 너무 기숙사라는 공간 하나에 묶여 있는 데다 다양한 반전이 잘 드러나지 않아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중대한 시대와 사건들을 코미디를 보는 관점으로 볼 수 있을까. 안기부 고위인사들의 아내들이 보여주는 기괴한 서열 행동들은 희화화된 풍자를 보여주지만, 그것 역시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다. 1987년이라는 시대의 엄중함이 이들의 희희낙락 또한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설강화' 논란은 '표현의 자유'냐 아니면 '역사왜곡'이냐는 양극단의 의견들이 맞부딪쳤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두 가지는 병치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에 대한 어떤 책임의식 없는 '표현의 자유'란 그 시대를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는 그 자체로 정서적 불편함을 주고 나아가 작품의 개연성을 떨어뜨려 완성도에서도 치명적인 결함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만일 1987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좀 더 무겁게 받아들였다면 '설강화'의 너무 가벼운 선택들은 피해지지 않았을까. 굳이 간첩 설정을 하고 오해로 이어지는 인연을 만들기 위해 별 생각 없는 대학생을 창조하며, 이들이 인질극 같은 테러리즘 속에서 관계를 이어가는 무리수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의 완성도는 그저 무한한 상상력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 작품이 쓰는 소재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전제되어야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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