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어느 소설가의 말하기

이근자 소설가

이근자 소설가
이근자 소설가

'매일춘추'라는 지면이 내게 주어졌다. 춘추라는 단어가 '춤추기'처럼 들려 우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춤을 우아하고 멋지게 추는 사람이 늘 부러웠다. 그래서 가수나 운동이라도 음악이 곁들여진 종목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동영상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김연아가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자신의 몸을 어쩌면 저 정도로 잘 다룰까, 감탄하게 된다. 유연성과 힘을 동시에 극대화시키는 것. 막춤이 안 되는 내게는 대단히 놀라운 능력처럼 보였다.

또 다른 생각도 들었는데, 신문 지면이 평면이 아니라 어떤 공간같이 여겨졌다는 것이다. 성탄절 벽에 걸어놓은 아이의 양말처럼 안과 밖이 구분되어 있는, 양말을 걸어 두어야 산타클로스든 아빠든 선물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 테니 말이다. 그랬다. 이 지면은 작지만 무한한 상상력으로 확장될 수 있는 성탄절 양말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가 아니라는 게 현실이었다. 그것을 직시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그 양말의 표면에 분홍색 하트와 막대사탕을 붙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비어있는 양말을 선물같은 글로 채워야 하고, 만약 그곳이 무대라면 춤도 온전히 혼자서 춰야 했다. 거기다 에세이라니. 내게 에세이는 글이 아니라 말과 같이 생각되었다. 허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등장인물이 춤추는 소설과는 엄연히 달랐다.

이쯤에서 나라는 사람은 말하기가 어려워 쓴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말이든 글이든 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것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은 글보다 직접적이고 전달력이 빠르다. 표정이나 손짓을 보태서 말을 강조할 수도 있고 눈빛으로 상대를 짓누를 수도 있다. 순발력이 더 많이 발휘되는 표현 수단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말하기보다 글로, 특히 소설로 표현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성탄절 양말을 되돌려주고 싶은가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지면은 내게도 선물이니.

다만 이 글이 소설가가 입을 떼고 하는 첫인사라, 걱정이 좀 되었을 뿐이다. 비관적인 낙관론자라는 말이 있다. 걱정을 많이 하고 난 뒤에야 낙관할 수 있는 세상사와 일상에 감사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도 그런 면에서는 낙관주의자이다. 세상 일이 또 생각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내가 막춤을 잘 못 추는 소설가면 어떤가. 앞으로 이 지면에 쓰는 나의 말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겠지만, 나도 나를 찬찬히 구경할 참이다. 아마 말하기가 이상하게 잘 되는 날이 있을 것이고, 얕은 관념의 틀에 갇혀 갑갑하기도 할 것이며,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툭툭 털고 일어날 참이다. 안 넘어진 척, 절대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걱정은 이쯤만 하고 가보자. 일단 가보기로 하자. 내 앞에 길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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