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여론조사의 덫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남영찬

남영찬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남영찬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정보에는 많은 숫자가 포함되어 있다. 숫자는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 그래서 숫자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초미세먼지 수치가 높으면 야외 산책을 포기한다. 주가지수와 선물지수에 목숨을 건다. 혈당 수치에 따라 음식이 달라진다. 맛집이나 유튜브 콘텐츠는 조회수가 선택의 기준이다. 가히 숫자는 우리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숫자를 왜곡하거나 잘못 다루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엄정하여야 할 재판도 예외가 아니다. 레일라 슈넵스(Leila Schneps) 등은 수학적 오류로 오판이 된 사건들을 분석해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여자 변호사인 샐리 클라크(Sally Clark)는 돌연사한 한 살 터울의 두 자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동일한 가정에서 영아 돌연사가 두 번 발생할 확률은 100년에 한 번 정도라는 수학적 입증을 근거로 1999년 11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상급법원에서 혐의를 벗었으나, 샐리는 '재난 경험 후 지속적 인격 변화'로 석방 4년 뒤 생을 마감했다. 수학의 오류로 인한 오판이 죽음의 재난이 되었다.

여론조사 지지율은 선거에 있어 절대 신이다. 그래서 선거 여론조사는 객관성과 정확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현실은 부실한 여론조사기관의 난립과 법령의 미비로 들쭉날쭉한 여론조사 결과가 공표돼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협조적인 여론조사기관에서 왜곡된 높은 지지율을 발표하고, 조사를 의뢰한 언론사가 기사를 내보내 유동적 표심의 유권자들을 상대로 승자편승(bandwagon) 효과를 노리는 선거운동이 비일비재하다. 언론사와 여론조사기관의 기이한 상생 구조가 만들어낸 경마식 여론조사와 보도의 폐해는 심각하다. 인물, 공약과 정책, 미래 비전 등이 선거운동의 축이 되고 선택 기준이 되어야 마땅하나, 이를 밀어내고 왜곡된 여론조사 지지율과 보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대선 후보자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를 뜯어보면 그 신빙성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올해 1월 1~4일 공표된 대선 여론조사 결과는 1, 2위 후보자의 지지율 차이가 최고 12%포인트(p)에서 최저 1%p의 분포를 보였다. 11%p의 차이는 선두 후보자에 대한 최대 지지율(40%)의 4분의 1을 초과하는 폭이다. 여론조사의 제도적 불완전성을 감안하더라도 수학적 검증이 필요한 큰 폭의 차이다.

영국 총리를 지낸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새빨간 거짓말보다 더 심한 거짓말이 통계라고 했다. 통계적 기법이 적용된 여론조사 지지율이 사실은 은밀한 기법이 동원된 거짓 '숫자'일 수 있다. 프랑스의 일간지 '우에스트 프랑스'(Ouest France) 편집국장은 올해 4월의 대선 관련 여론조사 보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론조사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곡된 여론조사를 진실인 양 언론이 대대적으로 호도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거 여론조사의 공공성에 걸맞은 엄정하고 투명한 여론조사를 담보하는 법령의 정비가 절실하다. 핵심은 선거 여론조사를 보는 프레임이다. 공직선거법은 여론조사를 선거운동으로 보고 있다. 이 프레임에서 보면 여론조사를 의뢰하는 언론사는 선거운동을 하는 셈이다. 선거 여론조사를 둘러싼 여러 문제점은 잘못된 이 프레임에서 발원된다.

공직선거법에 여론조사의 장을 따로 마련하거나, 별개의 입법으로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아가 난립하는 민간 여론조사기관의 등록 기준을 정비하고, 정확하고 공정한 여론조사, 사후 조사·감시에 관한 정치한 규정들이 필요하다. 공직선거법은 여론조사 시 전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피조사자 선정, 편향된 어휘·문장 사용 질문 금지, 응답 강요·유도 등 금지, 사행성 조장 방법의 조사 금지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들 규정만으로는 미흡하다. 유권자의 후보자 선택 기준을 인물, 정책과 공약, 미래 비전에 집중시키고, 부실한 여론조사의 폐해를 방지하는 입법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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