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기자의 나무오디세이] ‘늙은 잣나무’도 동량(棟梁)이 된다

군위 대율리 잣나무
군위 대율리 잣나무

옛날 시골 사람이 한양 나들이에 나섰다. 이것저것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돈이 떨어지고 배가 고팠다. 시골 사람은 어느 가게 앞에서 옷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옷이오(오시오)'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잣을 보고 또 무엇이냐고 물었다. '잣이오(자시오)'라는 대답을 듣고 잣을 한 움큼 집어 먹었다. 허기를 면한 시골 사람은 이번엔 머리에 쓰는 갓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고 '갓이오(가시오)'라는 주인의 대답을 듣고 인사를 하며 집으로 갔다.

잣은 예전에 흔히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아니기 때문에 맛있다는 얘기를 에둘러 표현한 전래동화다.

◆잣은 한반도 특산물

먹을 수 있는 잣이 열리는 잣나무는 한반도에서 자라며 상록침엽수다. 학명에도 코레이언시스(Pinus koraiensis)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중국인은 신라송, 일본인은 조선오엽송, 서구에서는 코리안파인(Korean pine)으로 부른다. 소나무는 잎이 두 개인데 비해 잣나무 잎은 다섯 개가 모여 나며 잎 양쪽에 숨구멍이 있어 멀리서 보면 희끗희끗하게 보인다.

어른 주먹보다 굵은 잣송이에 씨앗이 보통 100여 개가 들어있지만 아주 굵은 송이에는 200개나 들어 있다고 한다. 송진이 묻어나는 잣송이의 비늘을 뒤로 젖히면 비늘 사이에 딱딱한 알맹이가 들어있다. 잣의 배젖에는 지방유(脂肪油)와 단백질이 많이 함유돼 있어 고소하고 향이 좋다. 자양강장 효과도 있어 약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오엽송
오엽송

잣나무는 한반도에서 만주에 걸친 지역에서 분포하지만 중국의 만리장성 이남의 본토에는 자라지 않는다. 신라시대 사신들이 당나라로 갈 때 잣을 많이 가지고 가서 팔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잣을 신라송자(新羅松子)라고 불렀다. 또 바다 건너 신라에서 왔다고 해서 해송자(海松子)로도 불렀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避隱)의 '신충이 벼슬을 버리다(信忠掛冠·신충계관)'라는 일화에는 잣나무가 신의(信義)의 증거로 등장한다.

신라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자주 궁중의 뜰에 있는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면서 때로는 시문을 논하고 세상 이야기도 했다. 하루는 신충에게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효성왕이 임금 자리에 올라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정작 신충을 잊어버렸다.

이에 신충은 '뜰의 잣나무가 가을에 시들지 않듯이 너를 어찌 잊으랴, 우러러보던 얼굴 계시온데 달그림자가 옛 못의 일렁이는 물결을 원망하듯이 네 얼굴만 바라보니 세상도 싫구나' 라는 글을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이를 이상히 여긴 왕이 사람을 보내 나무를 살펴보게 했더니 신충의 글을 갖다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신충에게 벼슬을 주니 잣나무는 그제야 다시 살아났다.

잣나무는 소나무과 집안의 나무라서 사시사철 늘푸른잎을 가졌다.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푸르기 때문에 한국인이 아끼는 나무 중 하나다. 소나무와 함께 송백(松栢)으로 부르며 고고한 선비의 기상과 충정에 자주 비유됐으며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잣나무를 궁중에 심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잣

◆고급 목재 홍송

대구 앞산 고산골에 1980년대 조림 사업 덕분에 잣나무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대형 산불피해를 입은 산림을 복구하기 위해 1983년 축구장 33개(24ha) 넓이로 조림돼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주목받고 있다. 팔공산 곳곳에도 조림단지가 눈에 띈다.

산에 잣나무는 많지만 잣송이를 구경하기 힘든 이유는 심은 지 20년이 지나야 잣이 열리고 수령이 30년 넘어야 상품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작황이 해마다 고르지 않은 점과 잣송이가 나무 꼭대기 우듬지 바로 아래 열리는 것도 한 원인이다.

김천시 수도산에도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산책로를 따라 도열해 있어 장관이다. '수도산 치유의 숲'의 자작나무 조림지를 가기 전에 왼쪽 모퉁이 산책길을 따라 가면 하늘을 향해 쭉쭉 치솟은 회갈색의 잣나무들이 능선을 차지하고 있다. 돌려나는 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뻗어 긴 삼각형의 안정된 수형을 자랑한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조성된 데크를 걷다보면 저절로 얻게 되는 게 힐링이다. 늦가을에 가면 어른 주먹보다 큰 잣송이들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잣나무 목재는 약간의 붉은 기가 돌아서 홍송으로 불리는데, 향기가 좋고 틀어짐이나 수축과 팽창이 적으며 가벼워 고급 건축재나 가구재로 이용된다. 나무진(송진)이 있어 백주(栢舟)로 불리는 선박을 만드는데도 많이 쓰였다.

유명한 기생인 황진이는 말년에 잣나무 배를 보고 첫사랑을 회상하는 시 '小栢舟(소백주)'를 지었다.

汎彼中流小栢舟(범피중류소백주)

저강 가운데 떠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幾年閑繫碧波頭(기년한계벽파두)

몇 해나 물가에 한가로이 묶여있던가

後人若問誰先渡(후인약문수선도)

후일 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고 물으면

文武兼全萬戶侯(문무겸전만호후)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찾아주는 사람 없는 자기 신세가 꼭 몇 년째 물가에 묶여있는 잣나무 배처럼 처량했을까. 누가 첫사랑이냐고 훗날 묻는다면 모두 갖춘 멋진 분이라고 하리라는 대목에서 순정이 느껴진다.

김천 수도산 잣나무
김천 수도산 잣나무

◆우리나라 잣나무 무리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잣나무 무리에는 '토종' 잣나무와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잣나무, 설악산 대청봉 등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라는 눈잣나무가 있다. 또 조경용으로 뜰이나 정원에 많이 심는 오엽송과 1920년대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이 원산인 스트로브잣나무가 있다.

눈잣나무의 접두사 '눈'은 '누운'의 준말이다. 설악산 대청봉이나 중청봉 정상부에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땅에 기듯이 아주 낮게 자라는 품종이다.

우리나라 식물이름에 접두사 '섬'이 들어가면 대부분 울릉도 특산종이다. 섬잣나무 역시 울릉도가 고향으로 잣방울이 작고 날렵하며 씨앗에 짧은 날개가 붙어있는 것이 일반 잣나무와 다른 점이다. 섬잣나무에는 울릉도에서 자라는 '진짜' 섬잣나무와 일본에서 개량돼 요즘 정원에 많이 심는 오엽송(五葉松)이 있다.

북미서 한반도에 이민 온 스트로브잣나무는 잣방울이 길쭉하며 가지에 올망졸망 달렸을 때 땅을 향해 매달려 있다. 요즘 아파트단지 주변 조경수로 심는 잣나무는 대부분 스트로브잣나무다.

스트로브잣나무
스트로브잣나무

◆군위 남천고택의 쌍백당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남천고택(南川古宅)은 경북 민속문화재 제164호다. 담장 안쪽에는 수령 260년이 넘는 한 쌍의 잣나무가 우뚝 서서 고택을 지키고 있다. 높이는 10m정도며 가슴 높이 둘레는 2m를 넘는 거목이다. 잣나무는 수명이 길지 않은 편이어서 나이 200년이 넘는 것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 수령이 200~300년 정도 되면 대개 보호수로 지정되는 실정이다.

군위 대율리 잣나무가 장수하고 있는 것은 부림홍씨(缶林洪氏) 집성촌 집안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이다. 260년 전에 남천고택을 지은 홍우태(洪寓泰)가 잣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었고 당호도 '잣나무 한 쌍'을 뜻하는 쌍백당(雙栢堂)으로 지은 까닭에 후손들이 대대로 소중히 여기고 보살펴왔다. '한밤마을'로 널리 알려진 대율리의 전통가옥과 잣나무 한 쌍이 잘 어울려 마을의 품격을 더 높인다.

영천 송곡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 학자 류방선(柳方善)이 지은 한시 「古栢」(고백)은 '늙은 잣나무'를 통해 바람직한 선비의 모습을 투영하며 예찬했다.

獨立空原老幹長(독립공원노간장)

빈들에 홀로 늙은 가지 길기도 하여라

天生異物豈尋常(천생이물기심상)

하늘이 특이한 물건을 냈으니 어찌 평범하리오

寧將艶態爭桃李(영장염태쟁도리)

고운 자태를 가지고 복사꽃 자두꽃과 다투겠는가

但保貞心傲雪霜(단보정심오설상)

다만 곧은 마음 보존하여 눈서리를 업신여기네

寒色肯移千載翠(한색긍이천재취)

추운 날씨인들 천년의 푸름을 바꾸겠는가

疎陰不變四時凉(소음불변사시량)

성긴 그늘이지만 사시의 서늘함 변하지 않네

莫言材大終難用(막언재대종난용)

재목이 커서 끝내 쓰이기 어렵다고 말하지 마오

曾入明堂作棟樑(증입명당작동량)

일찍이 명당에 들어가 큰 기둥 되었다네. 〈『泰齋集』(태재집)3권〉

홀로 빈 언덕에 속세와 떨어져 있는 늙은 잣나무를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고고함과 절개를 가진 존재로 보았다. 눈서리와 같은 시련을 무시할 정도로 역경을 이겨내 늙은 나무도 동량지재로 훌륭하게 쓰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른을 배제하려는 세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가 오늘날 '세대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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