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김현옥(오울북스 대표) 씨 부친 故 김재근 씨

3남 4녀 중 막내로 초등학교 졸업 후 책 대신 지게를 지고 일하셨지요

김현옥 씨가 어릴 때 부친 고 김재근 씨와 함께 찍은 사진. 가족 제공.
김현옥 씨가 어릴 때 부친 고 김재근 씨와 함께 찍은 사진. 가족 제공.

1938년생 호랑이띠인 아버지는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아버지는 원래 내성적이고 순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큰 형님이 외아들을 하나 낳고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막내보다 손자를 더 애지중지 했다. 아비 없이 자라는 손주(장손)이 가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할머니는 눈에 띠게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는 책 대신 지게를 어깨에 짊어져야 했다. 그 사이 아버지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조카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그 뒷바라지를 아버지가 도맡아 했다.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집안살림을 꾸려나갔다.

문제는 조카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교수까지 하는 동안에도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끝이 없었다. 거기다 가지고 있던 논마저 할머니가 조카에게 주려고 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조카는 미안한 마음에 작은 아버지에게 논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그 이후 우리 집은 할머니와 아버지와의 다툼이 부부싸움으로 번지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매일 술만 드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어서 빨리 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더니 할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원망은 고스란히 나에게까지 왔다. 할머니와 아버지처럼 싸우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자랐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교회에도 다니고, 성당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한 몇 년여를 술 속에 빠져서 지내시더니 갑자기 돌아가셨다. 슬픔과 후련함이 공존하는 묘한 감정을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내가 아버지가 성당에 다닐 즈음 나이가 되고, 나도 세례를 받고 보니 조금씩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세례를 받은 이후 두 번째 미사를 보는데, 앞 자리에 아버지와 꼭 닮은 분이 계셔서 뚫어지게 쳐다봤다. 속으로 '정말 아버지와 많이 닮으셨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은 그날 이후로 미사에서 보지 못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1년이 되는 지난해 가을에 아버지 일대기를 만들어서 추석 차례상에 같이 올렸다. 이렇게나마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떨쳐버리고 싶었다. 일대기를 만들면서 아버지 자료를 찾다 보니 아버지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됐다.

서당에 다니면서 보셨던 소학 맹자 논어 같은 책들, 농지개혁 상환증서들, 그리고 아버지가 아끼셨던 족보들 속에서 아버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빛 바랜 사진 속 외갓집에서 나를 안고 계시거나 중학교 졸업식 때 딱 한번 와서 찍은 사진이 아버지와 나를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기억을 더 더듬어보니 사진에 남겨진 이상으로 아버지가 내게 보였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하숙집을 얻어주고 떠나던 뒷모습, 대학 때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칸막이를 쓰다듬던 손바닥, 늦은 나이에 성당에 다닌다고 양복을 갖춰 입던 모습 등등….

​아버지와 얘기를 많이 나누지 않아서 아버지의 꿈과 행복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됐다. 아버지,저도□ 나이가 되어갈수록 미움보다는 그리움이 커지니 이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래는 늦은 나이에 아버지에게 바친 추모시다.

결명자

녹내장을 앓으셨던 아버지는 봄이면

파란 페인트로 再建이라고 크게 쓰인 나무대문 옆

예전 여덟식구가 옹기종기 똥을 누던

측간이 있던 자리에 결명자를 심었다.

유채꽃 구경한다고 남들 제주도 갈 때

홀로 남아 무논에 써레질 하면서도

논 팔아 대학까지 보낸 아들 놈 탓하지 않았다.

사는 거시 내 맘대로 되간디……

한번 휘저은 흙탕물이 가라앉을 즈음

백자 담배 한대 붙이며

두루미처럼 홀로 논두렁에 앉아 있었다.

어버이날이라고 모처럼 아들이 찾아왔을 때도

파도처럼 일렁이던 논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부리를 아래로 한 채 고개를 끄덕이다

인기척에 놀란 듯, "왔냐"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조금만 더 있다가 갈란다

한참을 걸어 동네어귀에 접어들었을 즈음

뒤를 돌아 바라보니

두루미 한 마리 논 가운데 외다리로 서서

날개를 몇 번 퍼덕이더니

그대로 서쪽하늘로 날아갔다.

결명자 차를 끓일 때면

아버지의 진흙눈동자가 생각나

자꾸 오른쪽 눈을 비비게 된다.

그려, 사는 거시 내 맘대로 되는 거시간디……

"아버지, 이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에서는 마음껏 웃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김현옥 씨의 부모인 고 김재근(사진 오른쪽) 씨와 한열봉 씨의 사진. 가족 제공.
김현옥 씨의 부모인 고 김재근(사진 오른쪽) 씨와 한열봉 씨의 사진.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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