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글을 솜씨 있게 쓴 게 글씨이다. 잘 쓴 글씨는 한자로 '서예'(書藝)라고 한다. 불과 30~40년 전, 서예는 대학의 사회교육원이나 각 단체가 개설한 신부교실에서 규수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은 과목이었다. 그것은 요즘처럼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이 적었던 조선의 명문가에서 마음씨, 솜씨, 말씨, 맵씨(몸가짐), 글씨를 오씨라고 하여 혼사를 앞둔 규수에게 여성성을 갖추게 하려는 가정교육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씨 문화는 글자가 생긴 이래로 실용 목적으로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그 대중화의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중국 주나라에서 벼슬살이를 꿈꾸는 사람들은 여섯가지 기예를 익혔다. 육예(六藝)로 알려진 여섯가지 기예는 예절, 음악, 활쏘기, 말 몰기, 글씨쓰기, 수학이다. 주나라 때 글씨를 잘 쓰면 관리로 등용되었으니, 그 시절부터 사람들은 서예에 관심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에도 서예에 대해 관심의 추가 드리워진다. 고려 광종 때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기술 관료를 뽑는 잡과에서 글씨에 능한 사람을 채용하는 명서업이 있었다. 글씨에 재주 있는 사람은 벼슬을 얻기 위해 명서업에 도전하여 벼슬살이를 했다.

글씨로 명성을 얻은 사람은 단연코 조선 중기의 명필인 석봉 한호이다. 그는 글씨 쓰는 벼슬인 사자관 출신으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수행하여 외국까지 필명을 떨쳤다.

왕조가 거듭되면서 실용적인 글씨에 예술의 옷을 입힌 서예가들이 속속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람이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이다. 그는 하늘 아래 첫 번째 행서로 칭송받는 '난정서'를 짓고 쓰면서 역사상 서예의 최고봉인 서성(書聖)으로 불린다. 조선의 추사 김정희도 이에 버금가는 불후의 명가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입체파 화가 피카소도 "서예는 조형예술의 극치이다. 내가 서예를 먼저 알았더라면, 그림을 안 그리고 반드시 서예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해외에서 서예의 진가는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서예를 홀대하거나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 곱씹어본다.

청나라의 유희재(劉熙載)가 그 답을 말한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 곧 글씨에는 그 사람의 인격, 기질, 학문, 취향 등 모든 게 담겨있기에 한 마디로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고 정의했다. 서예는 서예일 뿐 타 장르와 비교불가하다는 게 유희재의 언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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