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피소드로 읽는 전쟁 톡톡] 결혼식장에서의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

스무 일곱 해 전 어느 봄날, 나는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서둘렀다. 멀리 목포까지 혼례의 집례자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밤새 내린 비로 제법 질퍽해진 도로와 차창으로 부딪치는 거센 빗줄기는 멀고도 낯선 길의 운전을 여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영남의 경계선을 넘을 때 쯤 혼례 장소인 목포농협 대회의실에 시간 맞게 당도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옥 죄어 왔었다. 급기야 경건한 예식에 늦어질 것 같은 예감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생각 끝에 나는 전북 고창군의 어느 면소재지 마을에서 승용차를 세우고 택시로 바꾸어 탔다. 조금이라도 빨리 당도하려는 선택이었다. 발을 동동 굴러 보았지만 나는 결국 20분이나 지나서야 혼례식장에 도착하였다.

조금은 지처보이는 하객들, 그 보다 더한 애를 태웠을 신랑신부 그리고 특별히 초대했다는 피아노 반주자, 그들은 주례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혼주는 느긋했다. 국토의 남서 끝단까지, 그것도 빗길이라 늦어지나 보다 하고 하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다렸노라며 나를 반겨 맞았다.

그 지체된 시간 동안 피아노 반주자는 내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워털루 전쟁' 등의 웨딩곡을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연주해 주었단다. 물론 그 이후 신랑신부가 웃으면서 들려준 자신들의 혼례담이었다.

워털루 전투 악보
워털루 전투

축혼곡으로 널리 사랑 받는 '워털루 전쟁'은 1860년 길먼 앤더슨이 쓴 피아노 소곡이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선율 위에 치열한 전장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다 승리를 표징하는 악곡의 이미지가 매력을 더해준다.

1815년 2월, 어둠이 밀려드는 초저녁을 틈타 나폴레옹은 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1년 가까이 머물던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하자 정부군은 나폴레옹을 격퇴하기는커녕 오히려 충성을 맹세한다. 파리로 무혈입성한 나폴레옹의 적은 영국 중심의 연합군이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벨기에 브루쉘에서 멀지 않는 대평원(워털루)에서 웰링톤과 결전을 치룬다.

접전하기까지 양 진영은 추격과 추격을 거듭하면서 서로 많은 전력을 소모한다. 공격자는 방어자에 비하여 3배 이상의 전력이 요구된다는 전쟁 원리에 비춰보면 나폴레옹은 웰링톤에 비하여 열세였다. 급조된 군대 편성, 열세한 병력 수, 거기다가 지휘체계와 응집력면에서 열악했다. 그렇지만 유럽의 지도를 흔들어 놓은 불패의 영웅, 나폴레옹은 초기 전투에서 승기를 몰아치면서 워털루에 이른다.

김정식
워털루 전투 악보

날이 갈수록 나폴레옹 자신도 휘하의 지휘관들도 지쳐갔다. 자신의 명령 침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나폴레옹은 직접 전투 지휘에 나선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웰링톤은 기만과 기습 작전으로 나폴레옹을 제압해 나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자 총공세를 퍼붓는다. 러시아군의 증원을 받으면서 정면과 양 측방에서 나폴레옹을 집중 공격한다.

마침내 워털루에는 쌍방의 군인 4만 여명의 붉은 피가 얼룩져 흘렀다. 워털루 전투의 포화가 멎는 순간이었다. 신은 웰링톤에게 승리의 깃발을 안겨주었다.

패전자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이룩한 100일 천하의 막을 내린다. 아니 나폴레옹 존재 자체의 종말을 맞고 만다. 나아가 프랑스는 더 이상 세력 확장이 불가능했고 상대적으로 영국과 웰링톤은 승리의 영예를 유감없이 누린다. 웰링톤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전투지역을 굳이 'Waterloo(불멸)'라고 이름을 붙여 '워털루 전투'라고 불렀다.

전쟁의 승패는 그 과정보다 결과가 극명하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분위기는 음악을 비롯하여 문화예술의 다양한 장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승리자 웰링톤을 위한 헌정곡으로 만들어진 악곡, '워털루 전쟁'도 그 하나이다.

아끼는 제자가 부부의 가연을 맺고 '워털루 전쟁' 반주에 맞추어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덕담 한 마디를 남겼다. '앞날에 혹여 있을지 모를 액운은 오늘 이 주례자가 대신 땜을 했노라' 고, '사랑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된 두 사람은 일상을 행복열매로 가득 채우라'고...

청춘남녀가 사귀다 마침내 얻어낸 결혼이란 것도 사랑전쟁에서 얻은 선물, 승전의 전리품이 아닌가. 굴곡이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구가 어디 있으랴. 그야말로 결혼이란 사랑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더없이 값진 선물이 다.

아무리 축하해도 넘치지 않는 것이 결혼축하다. 성스러운 혼례식의 행진곡으로도 사랑받는 악곡, '워털루 전쟁'은 영원한 승리의 화신으로 기억하게 한다. 신혼부부에게도 하객에게도. 삶을 아름다운 승리의 길로 이끌어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김정식

김정식 전 육군삼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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