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겨울부터 활짝 피는 붉은 순정, 동백꽃

경북 울릉군 관음도 해안 절벽의 동백나무 군락.
경북 울릉군 관음도 해안 절벽의 동백나무 군락.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 연락선을 타고가면 울릉도라/ 뱃머리도 신이 나서 트위스트/ 아름다운 울릉도/ 붉게 피어나는 동백 꽃잎처럼/ 아가씨들 예쁘고/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는 호박엿/ 울렁울렁 울렁대는 처녀가슴/ 오징어가 풍년이면 시집가요/ 육지손님 어서 와요 트위스트/ 나를 데려 가세요♩

1960년대 당시 걸그룹 이시스터즈가 부른 히트곡 「울릉도 트위스트」의 1절 노랫말이다. 울릉도의 특산물 호박엿, 오징어와 더불어 동백꽃과 어울린 정경이 신나는 리듬을 탄 흥겨운 노래다. 경상북도 내 육지엔 동백나무가 자생하지 않지만 울릉도는 우리나라 동백나무의 자생지 동해 최북단 지역이다. 요즘에는 대구 도심 아파트 정원이나 공원에 원예종 동백나무가 잘 자란다. 기후 온난화 영향도 있고 추위에 잘 견디는 품종을 많이 육종한 덕택이다.

◆한겨울에 피는 동백과 봄에 피는 춘백

동백나무는 음력 동지나 섣달에 개화한다. 밀양아리랑 노랫말 중에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처럼 한겨울인 음력 11, 12월에 꽃이 피면 눈길을 사로잡는 게 당연하다. 남해안 동백은 한겨울에도 피지만, 울릉도의 동백은 초겨울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12월에 피는 꽃은 추위가 몰아치면 꽃송이를 떨군다. 그러다가 이듬해 추위가 물러나고 훈풍이 불면 다시 선홍빛 꽃송이가 만발한다. 초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수분하지 못한 채 떨어지므로 씨를 맺지 못하는 불임(不稔)이다. 그러나 2월말에서 4월까지 피는 동백은 씨앗을 맺기 위해 피는 꽃이기에 늦추위가 길어지면 5월에도 꽃이 핀다는 게 주민의 얘기다. 엄밀히 얘기하면 동백이라기보다 봄에 꽃피는 춘백이다.

일제강점기 교육자이자 언론인인 문일평은 『화하만필』에서 "우리나라 남쪽지역에는 동백꽃이 있어 겨울철에도 능히 곱고 화려한 붉은 꽃을 피워, 꽃 없는 시절에 홀로 봄빛을 자랑한다. 이 꽃이 겨울에 피는 까닭에 동백꽃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 중에서도 봄철에 피는 것도 있어 춘백(春栢)이란 이름으로 불린다"며 "동백은 속명이요 원래 이름은 산다(山茶)다. 산다라는 이름은 동백의 잎사귀가 산다와 비슷하게 생겨서 붙은 것이다. 일본에서 춘(椿)이라 하며,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은 해홍화(海紅花)"라고 소개했다.

울릉도 동백꽃
울릉도 동백꽃

◆동백꽃 아가씨, 춘희(春姬), 라 트라비아타

동백 춘(椿) 글자를 보면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소설 「춘희」의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떠오른다. 그녀는 한 달에 25일을 흰 동백꽃으로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으로 치장하고 사교 모임에 나타나는 '동백꽃 아가씨'다. 여자 몸의 생리적 변화인 달거리를 은유한 것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가 이를 토대로 만든 오페라가 유명한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다.

동백이 유럽에 알려진 사연은 아이러니컬하다. 체코슬라바키아 선교사 카멜은 필리핀에서 차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발견하여 유럽에 소개했다. 차(茶)를 포르투갈이 독점하는 바람에 귀해지자 차나무와 비슷한 동백나무를 차나무로 잘못 알고 널리 재배하여 유럽에 널리 퍼졌고 「춘희」의 인기에 편승해 18세기 중반 유럽 사교계에서 동백꽃 장식이 유행했다.

이런 사연의 '라 트라비아타'를 일본에서는 「춘희」(椿姬)로 번역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사용했다. 「춘희」의 한자 춘(椿)자는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의미하지만 중국에서는 참죽나무나 멀구슬나무를 의미한다. 헷갈리게 한다. 차라리 '동백꽃 아가씨'로 번역하거나 원작 그대로 '라 트라비아타'를 사용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동백꽃의 낙화는 꽃잎이 시들어 낱낱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싱싱한 꽃잎을 가진 통꽃으로 떨어지는 게 특징이다. 동백이 주목받는 이유 중에 하나다. 꼿꼿하게 통째로 떨어지는 낙화에서 꽃의 '기개'와 장렬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통꽃의 낙화에 사람들은 극적인 감정을 이입한다. 어느 작가는 한겨울 독야청청한 소나무를 닮은 꽃을 든다면 동백꽃을 손꼽는다. 찬바람이 불면 확 피었다가 눈보라에 시들지 않은 채 떨어지는 처연함에 마음이 확 끌린다고 예찬했다. 그러나 남자에게 농락당하고 버림받은 「춘희」에 나오는 비련의 여인 고티에는 결핵에 걸려 동백꽃과 같은 선혈을 토하며 쓸쓸하게 시들어 갔다.

◆ 선홍빛 통꽃 낙화, 순교에도 비유

천주교 신자인 지인은 동백꽃을 순교자에 비유한다. 겨울에도 짙푸른 잎을 달고 한기가 채 가시기 전에 붉게 피어나 한겨울 매서움을 무색하게 만들고, 한창 꽃이 아름다울 때 하얀 눈밭에 자기 목을 쳐내듯이 시들지 않는 붉은 통꽃으로 툭 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눈 위에 흐트러진 낙화는 진한 핏빛 순교를 연상시킨다. 몇 해 전 전주 치명자산성지 순례 길에서 동백나무를 많이 볼 수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원예종인 카네이션동백꽃
원예종인 카네이션동백꽃

조선 초기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동백을 산다화(山茶花)로 소개했으며 속명을 동백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 심는 것은 네 가지가 있는데 단엽홍화로 눈 속에서 피는 동백, 단엽분화로 봄에 피는 것을 춘백이라 하며, 동백과 춘백은 남해 섬에 많이 자라는데 거기 사람들은 땔감으로 쓰고, 열매를 따서 기름을 내어 머릿기름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조선 선비 유박의 『화암수록』 「화목구등품제」에는 동백을 신선 같은 벗 즉 선우(仙友)로 여기며 3등에 올렸다. 「화품평론」에는 "도골선풍(道仙骨風)이 속세를 벗어나 사람 무리를 떠나는 기상(絶俗離群)"이라 평하며 "날개가 달린 것이 뿔이 없음은 천지가 본래 한 가지 사물만을 편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자와 동백은 맑고 가녀린 꽃을 지니고 있는데도 빛나고 윤기 도는 네 계절의 잎이 있으니 더더욱 화림(花林) 가운데 맑고 높으면서 복(福)을 갖춘 것이라 하겠다"고 총론(總論)하였다.

◆ 이규보 시에 동백꽃 첫 등장

동백이 한반도에 정착한 시기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권제십육(卷第十六) 고율시(古律詩) 「동백화」(冬栢花)에 처음 등장한다.

桃李雖夭夭(도리수요요)

복사꽃과 오얏꽃은 고우나

浮花難可恃(부화난가시)

허튼 꽃이므로 믿기 어럽고

松栢無嬌顔(송백무교안)

솔과 잣나무는 교태롭지 못하지만

所貴耐寒耳(소귀내한이)

귀한 것은 추위를 이겨내기 때문

此木有好花(차목유호화)

이 나무는 고운 꽃이 피며

亦能開雪裏(역능개설리)

눈 속에서도 또한 견디어 내며

細思勝於栢(세사승어백)

곰곰이 생각하니 잣나무보다 나으니

冬栢名非是(동백명비시)

동백이라는 이름 옳지 않도다

복사꽃과 오얏꽃은 동백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겨울을 견디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눈 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함으로 동백이 더 사랑받아야 한다고 했다. 서로를 비교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동백의 뛰어난 모습을 매우 칭찬했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울릉도 동백을 읊은 구전가요도 있다.

동백꽃 향기롭다 바구니 옆에 끼고/

이 강산 이 섬 속에 봄이 왔네//

동백꽃 필 무렵 다시 오마 하더니/

꽃 지고 열매 딸 때도 오지를 않네

옛날 뭍으로 내왕하기 힘든 시절 외로운 섬에서 같이 자란 청춘들이 육지 나들이할 틈도 없이 사춘기에 접어들고, 서로 의지하던 '동네 오빠와 동생' 사이는 연인으로 변했다. 성년이 돼서 결혼에 성공하는 사례도 많이 있었겠지만 반대로 실연의 아픔을 곱씹는 경우도 흔했다. 동백의 꽃말 그대로 '그대를 사랑합니다' 혹은 '열정'을 가슴에 묻은 청춘들의 아픔이 베여있다.

동백겹꽃
동백겹꽃

◆ 동백꽃 애틋한 전설

동백의 고장 울릉도에는 동백꽃과 관련된 애틋한 전설도 있다.

울릉도 어느 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육지에 볼 일이 있어 떠났다. 남편이 돌아온다고 약속한 날짜는 다가왔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었다. 아내는 기다림에 지쳐 몸져눕고 끝내 숨졌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여인이 너무 가여워 넋이라도 위로해 주려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육지에서 돌아온 남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내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아내가 묻힌 묘지로 달려가 매일 같이 목 놓아 울었다. 어느 날 아내 무덤 위에 보지 못했던 빨간 꽃이 핀 조그마한 나무가 보였다. 꽃은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있었다. 바로 지금 울릉도에 자생하는 동백나무라고 한다.

울릉도 곳곳에서 오래된 자생 동백나무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연도교로 연결된 관음도에는 후박나무와 함께 동백나무가 해안 절벽에 빼곡하게 숲을 이뤄 장관이다. 2월 말에 찾아간 관음도에는 큐티클층으로 무장한 동백나무 잎의 반들반들한 표면에 해풍을 타고 온 소금기가 간혹 희긋하게 보였고 가지 사이사이에 맺힌 꽃망울은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춘백이라서 그런가. 어쩌다 핀 한 두 송이도 매서운 추위에 동상을 입은 듯 상처 입은 꽃잎을 수줍게 내밀뿐이었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가수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의 순정이 허투로 들리지 않거나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 이더군/(중략)/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 선홍빛 여운이 생각나면 화창한 봄날에 동백꽃을 보러 동해 외로운 섬 울릉도에 가보면 어떨까.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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