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경규의 행복학교] 마음속 평온을 찾는 방법

최경규

'잘사는 것'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내용 중에서도 중복되어 나오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면 바로 평온한 마음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잘 산다는 의미의 충족조건은 돈일 수 있고, 아픈 사람들에게는 건강일 수 있다. 하지만 돈도 너무 많으면 자만하기 쉽고, 건강도 너무 자신할 정도가 되면 간과하여 잃을 가능성이 크다. 돈, 건강, 명예라는 키워드가 잘사는 것에 대한 범주에는 분명 들지만, 인간이 종국에 지향하는 상태는 바로 평온이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 어쩌면 가장 잘사는 길이고 행복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과욕은 부족함 만하지 못하다고 했다. 보왕삼매론에서도 살면서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듯, 부족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인정하고 내려놓을 때, 삶은 더 평온하지 않을까?

6.25사변 이후, 부모님 세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압축적 근대화를 성공리에 이루었고, 경제뿐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과거 힘들었을 때의 아픔을 잊고, 더 풍족하지 못하여 불만과 화로 하루를 채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살아가며 언제가 마음이 평화로운가요?"라고 물었다. 제법 많은 이들이 여행 갈 때라 답하였다. 하지만 여행 갈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 같이 삶의 시간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인생은 힘들어진다. 일하지 않고 여행만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고 싶다. "그대는 왜 항상 평온 속에서만 살아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 반드시 행복해야만 한다는 그 사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집착이고 욕심이다. 욕심은 심지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조차 가리게 만든다. 때로는 지천명을 지나 이순의 나이라 할지라도 일어날 수 있는 욕심이나 화에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평온과 대립각에 서 있는 불만이란 감정이 생긴다면, 그저 한 발자국 뒤에서 당신이 끌려가지만 않도록 마음을 지켜보자, 감정을 억제하고도 저항하지 말자. 화가 난다면 그냥 느끼면 된다. 내가 화를 전적으로 흡수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내 자체가 화가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기분 나쁜 사람을 만났다고 잠시 기분 나쁠 뿐이지, 내가 기분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즉 나와 화를 분리하는 관점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고 수양을 하더라도 세상에는 자신의 결과 달리하는 이들은 늘 존재한다. 때로는 나의 행복을 위협하는 사람을 볼 때,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시달리는 입주민, 매일 보는 직장에서 자신의 뒷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평온의 유리 벽이 쉽게 깨어지기도 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는 더 큰 결점이 있으면서 남이 지닌 작은 결점을 흉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애써 외면하고 남의 약점을 크게 부각하거나 흉보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일로 나에게 상담을 청하는 일이 자주 있다.

누가 나에게 비수를 던졌다고 치자. 보통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그 비수를 다시 들어 던진 이를 향한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르게 반응한다. 바보처럼 웃기만 하고 애써 대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심(心)온도를 유지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은 무엇일까?

바로 날카로운 칼을 손에 잡을 필요도 없고, 화를 삼킬 필요도 없다는 것을 삶의 고수(高手)들은 알고 있었다. 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남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기에 굳이 우리가 흥분하거나 대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잘 사는 것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지나치는 인연에 너무 몰입하여 괴로워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자기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일이다. 소학(小學)에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라 하였다. 즉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는 뜻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미친다는 말이다. 즉 비수를 던진 사람에게 굳이 복수와 같은 칼을 갈 필요가 없듯, 반대로 복을 받고자 한다면 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을 내려준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반드시 돈이 많아야 선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잡보장경(雜寶藏經)에는 재물 없이도 보시할 수 있는 7가지 방법을 말하였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안시(眼視)이다. 안시(眼施), 눈으로 하는 보시라는 뜻. 안시는 항상 부드러운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처음으로 교감하는 것이 눈인사다.

서로 눈도 맞추지 않고 돌아서면 왠지 서먹서먹해진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눈길처럼, 또는 사랑하는 연인끼리 눈빛을 주고받듯 서로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며 복을 짓는 일이다.

행복으로 향하는 길은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람마다 무게를 달리하지만, 평온함에 대하여 수많은 선인이 노력해 온 수천 년간의 역사를 볼 때, 평온의 유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을 위해 반드시 나는 평온해야 한다는 굴레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롭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말자. 하늘에 처분을 맡겨두고 그를 용서하고,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자, 화(火)라는 뜨거운 감자를 들고 있는 손이 당신의 것이 아니지 않기를 바라본다.잡을 수도 없는 세월, 스쳐 가는 인연에 마음 두지 말자. 그냥 우리는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최경규

행복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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