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꽃을 들 때다

김영필 철학박사

김영필 철학박사
김영필 철학박사

약소민족의 수동적 근성이라고 해두자. 우리는 한(恨)을 복수로 풀지 않는다. 한을 부둥켜안고 달래어 가라앉힌다. 한은 푸는 게 아니라 달래는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탈리오법칙은 사랑의 부재가 잉태한 것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한의 한자 '恨'은 마음 심(心)과 간(艮)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艮'은 비수 비(匕)와 눈 목(目)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돌려 노려보는 갑골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음에 원한이 응어리져있다.

응어리져 쌓인 르상티망은 복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풀 수가 없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적장 헥토르를 죽이고서야 풀어진다. 호머의 '일리아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는 이유이다.

중국이나 일본 역시의 원한과 복수를 통한 한풀이만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한에는 원한과 복수의 메커니즘이 희미하다. 원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증류된다. 증류될 대로 증류돼 증오가 탈색된 채 침전된다. 삭이고 삭여진 원한은 이제 그 원한을 심어준 대상에 대한 정으로 승화시켜간다. 삭여진 원한은 더이상 원한이 아니다. 증오의 불씨는 여과될 대로 여과되고 태워질 대로 태워져 재만 남는다.

원한이 정한(情恨)으로, 나아가 나에게 원한을 심어준 상대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의 원한(願恨)으로 승화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한은 그저 한으로 남는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한을 타자화시킨다. 그러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푼다. 독특한 해한(解恨)의 카타르시스다.

한국인은 한이 많은 민족이다. 우리 민족에게 한은 어쩔 수 없는 토착적 정서다. 나를 버리고 간 사람에 대한 원한과 증오는 어느새 십 리도 못 가 돌아와야 할 그리움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증오를 사랑으로 전환하는 삭임의 미학이 아리랑의 한에 녹아 있다.

우리 민족은 나라 잃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한을 곱씹고 살았다. 만주는 슬픔의 공간이면서 그곳에 정착해 새로운 희망을 일궈내야 할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한을 삭이고 삭였다. 삭임은 단순히 한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어차피 한을 바깥에서 풀 수 없다면 안으로 가져와서 달래어 풀고, 미래를 위한 역동적 에너지로 승화해가야 한다. 한의 초월이다. 우리 민족은 한을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왔다. 한을 희망을 일구어내는 텃밭으로 만들었다. 한을 만지작거리면서 한과 더불어 살아왔다. 한 맺히게 한 대상을 증오하면서도 이내 돌아서서 증오를 품은 자신의 편협함을 뉘우친다. 이게 바로 회한(悔恨)이다.

한의 원형을 회복하자. 우리 민족은 원래 한을 바깥으로 칼날을 돌려 복수로 풀지 않았다. 그 한을 안으로 가져와 만지작거리면서 한의 실체가 다 닳을 때까지 달래서 풀었다. 오히려 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 지를 성찰한다. 지금이야말로 증오의 칼을 내려놓고 사랑의 꽃을 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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