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구미, 울산, 거제, 그리고 포항

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포스코 지주회사와 미래기술연구원 서울 설립이 중단됐다.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포스코가 후퇴했지만 이 문제는 재발할 것이다. 합의서를 보면 해결된 것이 없다. 모든 합의서는 문구가 애매하다. 그래야 나중에 서로 책임을 미룰 수 있다. 합의서에는 '이전을 추진한다'고 되어 있다. 포항 이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미래기술연구원은 본원(本院)을 포항에 설치한다고 했으니 분원(分院)을 서울에 설치할 수 있다. 분원이 본원보다 커도 된다. 법이나 정치로 기업을 붙드는 것은 일시적이다. 기업은 언제든지 어디로든 떠난다.

포항이 겪는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미, 울산, 거제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삼성물산이 직물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구미사업장을 폐쇄했다. 직물은 제분(製粉), 제당(製糖)과 함께 삼성그룹의 근본이었다. 구미 시민의 충격이 클 것이다. 구미, 울산, 거제, 포항은 산업도시다. 산업도시는 특정 산업에 특화된 도시다. 산업도시는 특정 산업이 호황일 때 성장하지만 불황일 때는 쇠퇴한다. 특정 산업의 흥망(興亡)이 곧 도시의 성쇠(盛衰)다. 그래서 산업도시는 자생력이 없다. 안타깝게도 산업도시 시대는 끝났다.

쇠퇴하는 도시를 어떻게 부흥시키는가. 시장이나 도지사는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한다. 기업이 떠나서 도시가 쇠퇴했으니 기업을 유치하면 다시 인구가 늘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인구가 많아야 기업이 유치된다. 기업은 시장, 도지사보다 영리하다. 세금을 쓰기만 하는 선출직 공무원은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을 이길 수 없다. 시장, 도지사는 랜드마크를 지어서 도시를 부흥시킨다는 생각도 한다. 이 생각의 바탕에는 '구겐하임 효과'라는 신화가 깔려 있다. 철강, 조선이 쇠퇴한 스페인 빌바오에 1억 유로를 들여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자, 관광객이 연간 140만 명에서 380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생긴 일자리가 900개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빌바오는 미술관 하나가 도시를 살린 사례로 회자(膾炙)되지만 신화는 재현(再現)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비슷한 사업을 벌인 거의 모든 도시가 실패했다.

얼마 전 많은 도시가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려고 경쟁했다. 이들 도시는 이건희 미술관을 랜드마크로 생각했다. 정부는 관람 수요가 많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후보지로 결정했다. 웬만한 도시에는 이미 좋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여기에 주기적으로 미술품을 대여해서 전시하면 된다. 대구시가 간송미술관 분원을 유치한 것도 비슷한 사례다. 사립(私立)인 간송미술관에 시 예산과 땅이 쓰였다. 대구경북연구원은 간송미술관 분원 유치로 생산이 1천억 원 이상 증가한다고 발표했다. 터무니없는 수치다. '구겐하임 효과' 신화는 프로스포츠에도 있다. 프로스포츠 팀 유치가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과장됐다. 삼성라이온즈 연간 수입은 입장료 120억 원, 부대 수입을 포함해도 300억 원을 넘지 않는다. 2019년 대구시 총생산은 58조 원이다. 새 발의 피다.

나는 문화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화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문화시설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시설은 투자가 아니다. 투자 효과가 있더라도 제한적이다. 문화시설을 짓거나 유치한다고 해서 도시가 성장하지 않는다. 큰 대학, 큰 기업, 큰 도시는 갑자기 쇠퇴하지 않는다. 갑자기 쇠퇴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모든 큰 조직은 천천히 쇠퇴하고 천천히 부흥한다. 시장이나 도지사는 대체로 마음이 급하다. 끊임없이 뭔가를 하지만 도시의 쇠퇴를 막지 못한다.

시장이나 도지사가 열심히 일할수록 예산이 줄어들고 주민들의 삶은 힘들어진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떠난다. 지금 있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시작이다. 그 도시에 사는 것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온다. 성공한 도시에 공통점이 없지만 실패한 도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장, 도지사가 너무 부지런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다. 다음 시장, 도지사는 덜 부지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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