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를 그린 '국화서양'이다. 이당 김은호의 증언에 의하면 옛 그림에 보이지 않던 무궁화를 화조화의 소재로 처음 그린 화가는 심산 노수현이다. 김은호는 "심산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적인 의지를 살려 화조는 무궁화를 화재(畵材)로 삼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에게 무궁화가 우리나라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꽃임이 알려진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다. 애국가가 한 계기가 됐다. 애국가는 근대국가 의식이 형성되던 19세기 말부터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제창됐는데, 노랫말은 달라도 후렴에 항상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무궁화를 민족정신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애쓴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계몽활동가인 남궁억(1863~1939)이다. 남궁억은 한반도를 무궁화꽃으로 채운 무궁화지도 자수본을 전파하며 무궁화 이미지를 널리 알렸고, 묘목을 보급해 무궁화 가꾸기 운동을 펼쳤다.
무궁화(無窮花)는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는 노랫말처럼 여름 몇 달간 연이어 무궁하게 꽃이 핀다. 그런데 이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한국한자다. 중국한자로는 근(槿), 근화(槿花), 목근화(木槿花)고 다른 이름도 많다. 중국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우리나라에 "근화초가 있다"고 했고,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최치원은 신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했다. 18세기 원예가 유박의 '화암수록(花菴隨錄)-목근(木槿)' 조에 "단군께서 나라를 여실 때 무궁화 꽃이 처음 나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컬을 때 반드시 근역(槿域)이라고 했다"는 말이 나온다.
무궁화가 우리나라와 연관되는 꽃나무임은 역사적 근거가 뚜렷하다. 이런 옛 기록을 바탕으로 민족지사들의 의식적 노력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민족 상징물로 자리잡게 됐다. 오세창이 자신의 연구물, 편집물에 '근' 또는 '근역'을 붙여 근묵, 근역화휘, 근역서휘, 근역인수, 근역서화징 등이라고 한 것은 따로 무어라 붙일 나라이름이 없을 때이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이뤄져온 민족문화를 통시적으로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은 "나라꽃이 상서롭고 밝다"는 '국화서양'(國華瑞陽)으로 제목을 썼고 꽃과 나비를 모두 커다랗게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소송(小松) 김정현(1915~1976)은 사생적 시각의 실경산수도 그렸고, 수묵추상화도 시도했으며, 전통적인 필치의 수묵채색으로 모란, 장미 등 꽃그림도 잘 그렸다. 화조화라는 오래된 감상화 장르에 20세기 들어 우리나라꽃 무궁화가 등장했다.
미술사 연구자
댓글 많은 뉴스
12년 간 가능했던 언어치료사 시험 불가 대법 판결…사이버대 학생들 어떡하나
[속보] 윤 대통령 "모든 게 제 불찰, 진심 어린 사과"
한동훈 "이재명 혐의 잡스럽지만, 영향 크다…생중계해야"
홍준표 "TK 행정통합 주민투표 요구…방해에 불과"
안동시민들 절박한 외침 "지역이 사라진다! 역사속으로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