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도록 잘 받았습니다. 대구 소식 생생하게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상화 시인의 사연이 담긴 죽농 서동균 병풍을 대구시에 기증하신 김종해 어르신과 종종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병풍을 소장하고 있는 대구미술관에서는 매번 기획 전시 도록을 보내드리고 있고, 병풍이 다른 기관의 전시에 출품된 경우에는 필자가 그 기록 자료를 보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해 어르신은 처음 뵈었을 때부터 품격 그 자체였다. 병풍을 확인할 때 서울 자택까지 찾아간 실무자들을 대하는 태도, 기증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 그리고 기증 후 1년 이상이 흐른 현재까지 모든 과정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주셨다. 별다른 요구사항도 없으셨다. 공공기관에 기증한 '예술자료는 이미 공공재'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기증 받은 곳에서 필요에 따라 잘 사용해주면 그걸로 되는 거죠. 잘 보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병풍의 원 소유자, 이상화 시인으로부터 병풍을 선물 받으신 김종해 어르신의 부친인 독립운동가 김정규 선생님도 아마 비슷한 모습이시리라 짐작된다. 특히 부친이 돌아가신 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유품을 소중히 간직하셨던 것으로 보아, 부친의 철학과 삶에 대한 믿음이 돈독했을 것도 같다.
예술인이 세상을 떠난 후, 그 가족들이 보관해 온 예술자료는 단순한 '물건'이나 '자료'가 아니다. 예술인뿐만 아니라, 가족이 그 예술인의 활동을 지켜본 가족의 이야기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소중히 보관해온 자료를 선뜻 기증해주시는 유족을 만나면, 예술가와 그 가족의 품격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바리톤 이점희 선생님의 아들 이재원 씨는 부친의 음악활동을 가까이서 지켜봐왔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30년 동안 작은 신문스크랩 조각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다 기증해주셨다. 대구 음악을 위해 노력한 부친의 희생과 노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식으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활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작곡가 김진균 선생님의 딸 김은숙 교수는 부친의 뒤를 이어 음악을 전공한 책임이라시며, 모든 자료를 손수 분류한 다음 기증해주셨다. 김진균 선생님의 예술 활동 자료 외에도 당대 작곡가들의 작곡집도 순차적으로 기증해주시겠다는 의사도 밝혀오셨다. "예술가의 가족이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제 그 책임을 내려놓고 공공 시스템에 맡기려합니다."
연극인 이필동 선생님의 가족은 아무도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예술자료가 활용될 때마다 소식을 전해드리면, 부인과 아들은 한결같은 말로 대답해오신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있을 때 가치를 판단하기 힘들었던 자료들이 이렇게 잘 활용되니 기쁩니다."
또 다른 유족은 자신의 선친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신 작고 예술인들의 유족을 찾아 자료기증 추천까지 하셨다. 그 결과 최근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저희 아버지 육필과 작품 활동 자료들을 찾아 놨습니다. 한번 들러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1910년대에 출생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한 예술가의 아들이었다. 1986년 부친이 돌아가신 후 가족이 보관해 오던 유품을 선뜻 기증해주시겠다는 것이 통화의 주 내용이었다.
물론 지난해 연말부터 몇 차례 연락을 시도했던 것에 대한 응답이었지만, 잊지 않고 챙겨주신 것이다. 문화예술과 연관 없는 일을 하시고, 또 그 예술인이 돌아가신 후 37년이 지났기에 작은 기대만 품고 있었는데, 너무 반가운 전화라 곧 찾아뵙기로 약속드렸다. 그 예술인의 이름은 기증 절차가 진행되면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예술자료를 기증해주신 예술인들의 유족들을 한분씩 돌아보면, 돌아가신 그 예술가의 품격이 가족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자료라도 집에 남아있으면 하나의 개인 유품이지만, 사회에 기증하면 예술사에 길이 남을 공공재가 된다.
소중히 간직한 자료들을 과감히 꺼내 전문가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면, 유족이 그 예술가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인사를 밝고 경쾌하게 하는 유족도 있고, 간혹 쓸쓸한 모습을 보이는 유족도 있다. 힘찬 박수로 예술자료를 떠나보내 주시는 유족들이 더 많음에 감사드린다.
임언미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장,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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