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내가 겪은 4·19 혁명을 회고한다

김한기 (사)대한노인회 구미시지회 부회장

김한기 (사)대한노인회 구미시지회 부회장
김한기 (사)대한노인회 구미시지회 부회장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 음모가 진행되면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열렸다.

선거 패배를 예감했던 자유당 정부는 정권에 눈이 멀어 고교생들의 유세장 참가를 차단하기 위해 일요 등교를 강행하기까지 했다. 학교에 따라 임시 시험을 치기도 하고, 단체 영화관람이나 토끼사냥을 하러 가는 일이 벌어졌다.

자유당 독재의 간계를 파악한 학생들은 불의에 항거했다.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바로 2·28이었다.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 조작을 한 것에 대해 반발하며 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시위는 3월 18일, 대모 대열에서 실종되었다가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더욱 격화됐다.

서울에서는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울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4월 19일 오전 9시에 일제히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지침을 정했고, 경무대 앞에는 대학생 2만여 명이 모였다.

이에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과잉진압은 국민을 격노케 했다. 대학교수들마저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시국 선언을 했고, 곧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다.

이렇듯 학생들의 희생으로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4·19혁명 당시 필자는 대학교 3학년생이었다. 뿌리까지 말라비틀어진 민주주의 나무를 살려보자는 일념으로 학우들과 뜻을 같이하며 교문을 나섰다.

당시 학생회장은 자유당 고위층의 친척이어서 동료 학생들은 변론부장으로 있던 필자에게 데모대의 총 지휘를 맡겼다.

도지사 관사로 가기 위해 2군사령부 앞을 지날 때, 소총에 칼을 꽂은 군인들이 우리를 격려하는 눈빛을 보여줘 오히려 사기를 돋워주었다.

광란하는 경찰들이 휘두른 방망이에 수많은 동료가 부상을 당했고, 소방관들은 우리 시위대를 향해 붉은 염료를 섞은 물대포를 쏘아댔다. 부상 학우를 돕기 위해 우리 일행은 어깨에 띠를 두르고 모금함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필자는 학장님의 지프차에 스피커를 장착하고 대구 시가지를 누비면서 "자유당정부는 무너졌습니다. 생업에 정진합시다"라는 구호로 하루종일 거리 방송을 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굵직한 획을 그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4·19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이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세계 민주화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시대감각이나 세대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학창시절에 있었던 4·19는 '자유회복과 질서의식'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지금도 그 당시 거리의 함성이 귓전에 메아리치는 듯하며, 당시의 일은 필자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보람있고 값진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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