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필리핀 바기오시(市)에 있는 국제학교에서 약 1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시던 목사님께서 목사님의 동생 부부가 운영하는 국제학교에 나를 추천해주신 것이었다. 그 학교는 한국의 유학생들과 필리핀 현지의 저소득층 학생들이 함께 미국의 정규과정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 학교에서 나는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컴퓨터 기초교육을 시켜주고, 근무시간 외에는 현지인 교사와 1대 1 튜터링(개인교습)도 할 수 있게 됐다. 외국에서 일을 하며 영어공부를 할 수 있다니! 꿈 같은 일이 내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조금씩 내 생각과 달라져갔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 대부분은 가정의 불화로 반항심이 가득했고,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 곳에서 비행과 방황을 자유롭게 행하고 있었다.
그들과 불과 5~7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내가 감당하기에 그들이 가진 상처는 크고 무거웠다. 24시간 그들과 함께 하며 허덕이다보니 1대 1 튜터링은 제대로 받아볼 시간도 없었고 급기야 우울증과 향수병으로 일주일을 앓아눕고야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 속에서 고등학생인 나를 만났다. 중창단과 합창단 활동을 하며 수많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나. 모든 근심과 괴로움이 무대 위에 울려 퍼지는 노래 속에 묻혀 사라지던 그 때.
그 때가 그리웠던 것일까, 상처로 얼룩져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지금 나를 괴롭게 하고 있는 이 아이들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일까. 꿈 속에서 나는 엉엉 목 놓아 울었고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있는 나도 울고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싶어졌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합창 악보를 받았다. 다짜고짜 몇 주 후에 있을 졸업식에서 합창을 하자고 악보를 내밀었다.
역시나 학생들은 협조적이지 않았지만, 결국 마지못해 승낙을 해줬다. 삐그덕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듯 연습은 이어져갔고, 대망의 졸업식 날이 왔다.
'시스터액트'처럼 영화같은 실력과 기립박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시울을 붉히며 뜨거운 감동에 젖었다. 함께 한다는 것, 각기 다른 여럿이 한 곳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모아 하모니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 날 이후로 학생들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두꺼운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갔고 학생들과 나는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함께 노래도 하고 연극도 했다. 그렇게 예술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마음의 문을 열어줬다.
예술이 가진 힘에 대한 강한 믿음은 내게 10년 넘게 해오던 직장생활을 과감히 접고 3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연극판에 뛰어들 수 있게 해준 용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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