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여러 도시와 마을에 러시아의 미사일 폭발음이 울려 퍼져나갔다. 러시아군대는 항전하는 우크라이나 시민을 향해 포격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하나의 국민'임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부정한다. 국제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전쟁 종식의 협상테이블을 번번이 내밀치고 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가운데 서방국가들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는 결속의 끈을 죄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국제 정치적 이해가 맞물려 있는 만큼 서방국가들은 공격자 러시아를 제재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슬라브계의 동족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불편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남부지역의 황금 땅, 우크라이나는 19세기 이후 유럽과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했지만 그 희망은 번번이 억압당하고 만다.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정권에 예속되었다가 1991년에 들어서야 마침내 독립 국가로 인정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1999년에 체결된 유럽 안보 헌장에 동의하였다.
2차대전이 일어날 무렵, 소비에트연방의 최고 권력자인 스탈린이나 나치를 기반으로 한 히틀러는 모두 독재의 고삐를 다잡고 주변국을 침략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폴란드를 가운데 두고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두 국가 간의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1939년 8월에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서로의 불안을 잠재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폴란드를 장악한 독일은 영국의 압박 속에서 장기전으로 들어간다. 전쟁 물자 확보가 관건이다. 다급해진 히틀러는 눈길을 러시아로 돌렸다. "러시아를 주목하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비롯하여 우랄의 지하자원, 코카서스의 유전, 그리고
베리아의 삼림 등 풍부한 자원이 독일 민족 번영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겨우 일 년을 넘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이 걸림돌이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약속을 깬다. 전쟁에서 이기고 결별을 미화하리라." 1941년 6월, 히틀러는 끝내 러시아 공격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배신이었다.
"러시아 국경으로 진격하라!"
불가침 조약은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허울에 불과하였다. 히틀러는 일찌감치 러시아 침공을 위한 바바롯사(Barbarossa) 계획을 수립한다. 180만 명의 대병력으로 소련 국경지대를 포위하고 본토 속으로 깊숙이 진격한다는 기본적인 전략에 따라 북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남부의 우크라이나 키이우 그리고 중부의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히틀러가 생각했던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독일은 2년 이상 레닌그라드 외곽을 포위하고 압박을 가했지만 끝내 밀려나고 말았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목표를 3대 영역으로 구분하였지만 사실상 주전장은 키이우 지역이었다. 히틀러는 8개 사단 병력을 키이우에 투입했다. 그러나 10만 명의 전사자를 제물로 바치고 1942년 4월 끝내 우크라이나를 포기해야 하였다. 모스크바 전투도 예외가 아니었다. 개전 초기 소련은 5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승리의 신은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최후의 전선, 볼가강을 배후에 둔 스탈린그라드 공격마저 실패한다. 대소 전쟁의 패배이자 배신자, 히틀러의 최후가 차츰 다가서고 있었다.
독소전쟁은 히틀러의 계획처럼 아름다운 배신의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독소전쟁의 결과는 국제사회에서 배신자의 마지막 모습이 어떤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1944년 4월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니까.
이와 달리 스탈린은 자신의 혁명지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냈다.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혁명 정신이 밴 땅이다. 소련의 서부 볼가강 하류에 있는 공업도시, 대구시만 한 크기의 차리친, 1918년 볼세비키 혁명을 이끌어낸 곳이다. 그 이후 스탈린 집권기에 스탈린그라드로 바뀌어졌으나 오늘날 다시 볼고그라드로 불리고 있다.
여러 이름을 가져야 할 땅의 운명인가. 독재자가 남긴 역사의 유산인가.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약속을 깬 히틀러나 땅 이름을 바꾼 스탈린은 물론 자신이 인정했던 우크라이나를 외면한 푸틴, 그 모두 자신들이 내세운 이유를 미화할 수 없다. 신뢰하기 어려운 변명자, 변덕쟁이들이다.
전쟁은 참으로 다양한 인물을 낳고 낯선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들의 독재적인 행태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는 세계인들에게 거울이 되어준다.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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