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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정조의 하사품 부채를 든 채제공

미술사 연구자

이명기(1756-?),
이명기(1756-?), '채제공 초상 시복본(時服本)', 1792년(37세), 비단에 채색, 120×79.8㎝,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 초상화 중 관청에서 평소 일할 때 입는 근무복인 시복(時服) 차림의 '채제공 초상 시복본'이다. 연분홍에 옥색 안감이 비치는 화사한 옷차림으로 양손으로 부채를 들고 파랑색 테를 두른 화려한 문양의 화문석 위에 앉아 있다. 이명기가 그렸고 1792년(정조 16년) 채제공 73세 때 완성됐다고 오른쪽에 써놓았다.

이 초상화의 여러 감상 포인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시 관례와 달리 두 손을 드러내 합죽선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왜 이렇게 그렸는지 채제공이 지어 자필로 써넣은 왼쪽의 찬문(贊文)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형이정(爾形爾精) 부모지은(父母之恩)/(너의 모습 너의 정신은 부모의 은혜_

이정이종(爾頂爾踵) 성주지은(聖主之恩)/(너의 머리부터 너의 발끝까지는 성주(聖主)의 은혜)

선시군은(扇是君恩) 향역군은(香亦君恩)/(부채는 임금의 은혜, 향선추 또한 임금의 은혜)

분식일신(賁飾一身) 하물비은(何物非恩)/(이 한 몸의 어느 물건인들 은혜 아닌 것이 있으랴)

소괴헐후(所愧歇後) 무계보은(無計報恩)/(이 몸이 마친 후라도 보은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부끄러울 뿐)

번옹(樊翁) 자찬자서(自贊自書)/(번옹(채제공)이 짓고 쓰다)

커다란 선추가 달린 부채는 정조의 하사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채를 쥔 모습으로 대대손손 전해질 초상화를 그려 임금의 각별한 은총을 나타냈다. 부채는 없어졌지만 초상화와 선추는 230년 동안 후손들에 의해 보존돼 지금은 수원 화성박물관이 소장하고있다.

선추는 천으로 만든 갑 안에 향을 넣는 향선추로 검은 비단에 대나무와 풀꽃을 수놓았다. 향이 은은하게 배어나올 수 있도록 향갑의 가운데 부분이 얇은 비단으로 돼 있었다. 선추는 파란 끈목으로 부채와 연결했다. 끈목 또한 부채, 선추와 마찬가지로 궁중 장인의 솜씨이다. 부채는 군신의 정의를 돈독히 하기에 손색없는 멋스러운 선물이었다.

접혀있는 선면의 그림이 궁금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의 그림일수도 혹은 정조가 부채그림을 잘 그린다며 "김홍도와 백중(伯仲)할 만하다"고 한 김득신의 그림일 수도 있겠다. 젊은 시절 정약용도 정조에게 부채를 하사받았는데, 김홍도가 연꽃과 오리를 그린 그림부채였다. 정조도 이런 부채를 손에 들었을 것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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