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반갑다 새책] 거시기 머시기

이어령 지음/김영사 펴냄

생전의 이어령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생전의 이어령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교육자, 문화부장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동해온 이어령 선생.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꼽으라면 당연 '언어'다.

이 책은 80년 일생을 언어의 힘에 천착해온 이 선생의 언어적 상상력과 창조의 근원을 담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언어, 그 생각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강연 원고와 대담 8편을 모아놓았다.

책 제목이 '거시기 머시기'하다. 이 선생은 '거시기 머시기'를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라고 한다. 막연한 언어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더듬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는 이 단어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는 이해력과 상상력을 끌어올리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태까지 포용할 수 있는 이 '애매어'에서 창조의 힘을 가져와야한다고 강조한다.

이 선생은 죽음을 통해 생을 말하는 모순과 역설의 미학도 언급한다.

한국인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유별나게 쓴다. 피곤해죽겠다고 말하며 퇴근하지만, 4층이 없는 아파트에서 산다. 죽을 사(死) 자와 음이 같아 좋지 않다는 게 이유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도 피곤해죽겠다 처럼 한국인이 잘 쓰는 관용어가 나온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다. 여기서의 죽음은 '죽어도 아니 한다', '죽어도 안 가겠다'처럼 '아니'의 부정어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증폭기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단순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에만 집중하면, 떠나는 임을 위해 눈물조차 보이지 않으며 이별의 슬픔을 감추고 참으려는 것으로만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의 모든 시제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하는 미래추정형 시제다. 즉, 현재 화자가 겪고 있는 가장 지고한 사랑의 기쁨을 가장 슬픈 이별의 상태로 표현한 것이다.

사랑을 생으로, 이별을 죽음으로 대치해보면 이러한 시적 아이러니는 인간의 삶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생을 말하는 역설의 발상인 셈이다.

이 선생은 이러한 시의 이중적이고 아이러니한 의미 파악에 익숙해지면, 사물의 의미나 느낌을 흑백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는 흑백 사이에 존재하는 '그레이 존'이야말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삶의 체험을 깊게 하는 이상향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 역시 시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O, X로 재단할 수 없음을 말한다.

언어 얘기로 가득한 책이지만, 곧 삶을 얘기하는 인생 설계서와도 같다. 그는 선동하는 언어 속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나의 세계를 설계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말하기의 핵심입니다. 뒤쫓아가지 말라는 것."

이 선생은 이 책을 편집하고 있을 때 영면에 들었다고 한다. 책의 첫페이지를 장식한 문구처럼, 이 선생은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언어 세계에서 길어낸 '거시기'를 끊임없이 '머시기'하고 있다.

"세상에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우리에게 끝없이 속삭이고 끝없이 책을 읽게 만들고 쓰게 하는 큰 힘을 가진 책일 것입니다." 304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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