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문학은 뭐하고 있었나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정점으로 치닫던 코로나의 기세도 이제 조금은 누그러진 듯하다. 아직 헤아릴 수 없는 불편과 고통이 우리의 일상 곳곳을 지배하고는 있지만 이전에 느끼던 막막한 불안함과는 분명 다른 감정으로 우리는 이 병마에 적응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몇몇 일간지의 국제 뉴스에는 북인도의 '잘란다르'라는 지역에서 찍은 한 장의 설산 사진이 실렸다. 모양새로 보아 아마도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8천 m급 고봉을 원거리에서 잡은 것으로 보였다. 무심코 넘길 만한 그 기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공장 가동을 멈추자 40년 만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히말라야 산맥이….'

그러니까 코로나로 인해 공장의 굴뚝이 연기를 뿜어내지 않고, 자동차들이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자 '원래'는 보였던 히말라야 산맥이 40년 만에 다시 그 위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잘란다르'라는 지역에서 그 히말라야 산맥은 무려 200km나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가 최악으로 악명 높은 인도의 대기질을 걷어내고 단 두 달여 만에 대구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설산의 풍광을 다시 보이게 했다.

이 웃지 못할 코로나의 기능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그 작은 도시에서 한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은 자신의 꽃 같은 시절에 희뿌연 매연 속으로 갑자기 사라진 설산을 다시 만나게 된 2020년의 이른 아침에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생태적 성격의 에세이 하나는 뽑아낼 만한 소재거리란 생각에 몇글자를 끄적이다가 슬그머니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먹먹한 감정 하나가 뇌수에 두텁게 올라앉아 더이상 글을 쓰기가 거북했다.

'문학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며 살았던 것일까.'

그렇게 되물었다. 문학은 환경을 위해 그동안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과연 그 유려한 문장 안에서 지어진 인간과 사유들은 얼마나 함부로 지구를 막 대해왔는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념이 맞지 않아서, 혹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그 공허한 이유만 들이대며, 문학은 얼마나 많은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함부로 거리와 강변에 버렸는가. 불공평을 이유로 쉽게 임야에 불을 지르고,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신경질을 나뭇가지를 꺾는 것으로 대신하지는 않았는가.

문학에서 환경은 거의 '공간'(space)'이었을 뿐 '무대'(stage)가 되어 본 적이 드물다. 말하자면 인간의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 이용되고 있었을 뿐 환경이 그 주체가 되는 문학은 사실상 드물었다.

특히 우리와 같이 어떻게든 '성장하기'로 다짐하고 '성장'과 '성장의 반작용'에 주목한 나라의 문학인들은 더했다. 언제까지 비와 눈, 더위와 추위를 감정적인 대상물로 생각하며 글을 쓸 것인가. 지금까지의 문학이 인간의 아픈 곳을 보듬는 인문학적, 예술적 영역에서 창작되었다면, 많이 늦어버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비가 오지 않아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무작정 타들어가는 메마른 대지와 얼음이 녹아 사라지고 있는 툰드라의 영구동토를 걱정하는 글을 써야 하지는 않을까. 환경의 보존과 복구를 위한 생태적 영역에서 문학이 그 영역을 더 넓혀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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