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세상을 환히 비춘다. 여리고 순한 햇살이다. 실로 오랜만에 공원에 나와 볕을 쬔다. 호흡이 나빠진 후, 언제 어디서든 실컷 쬘 수 있는 볕도 큰마음 먹어야 가능해졌다. 눈을 감으니 오감이 밝아진다. 볼을 어루만지는 바람과 청아하게 지저귀는 새, 향방을 알 수 없는 은은한 향기가 상한 마음을 위로한다. 가만가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떠나온 사람처럼 사뭇 진중해진다. 어느새 무욕(無慾)의 소박한 삶을 살기라도 하듯 내면 또한 깊어진다.
지금 내가 처한 고통을 대신 건너가 줄 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이름이 스친다. 어쩌면 그들의 소박한 삶을 곁눈질하며, 잠시라도 고통을 잊고 싶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이 순하고 여린 봄의 아침처럼 그들의 이름에는 분명 구김살이 없다. 애써 시간을 맞추거나 조급해하지 않아도 좋을.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면 요란하지 않은 일상을 만나게 된다. 어느새 침울하던 기분이 생긋해진다. 이름에는 따뜻한 음성과 온화한 성품이 살아서, 속이 아리다가도 금세 뭉근하게 번지는 미소로 그들과 마주하게 된다.
순한 바람 한 줄에는 강원도 홍천 내면에 들어 시를 짓는다는 허림 시인 떠오르고, 반려견을 보면 전라도 임실 김용만 시인이 애지중지하는 소양이가 생각난다.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에는 영월 땅 고철 시인이, 문득 바다가 그리울 때면 구룡포에서 억척스럽게 바다 사람들을 읽어내는 권선희 시인이 서린다. 생긋하게 연둣빛 새순을 뽑아 올리는 들판에 서면 정선으로 귀촌하여 농부가 된 이희건 선생님만 생각나고, 구멍가게 탁배기를 보면 김계훈 교수님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산책이 그리울 땐 김천 수도암에 계시는 원제 스님이, 이런저런 생각이 번지다 바다 건너 어느 섬이 몹시도 그리울 때는 울릉 댁 한외자 선생님과 제주 서귀포시 서종철 목사님이 그립다. 어디론가 바삐 뛰어가는 젊은이에게서는 서울서 청춘을 사르느라 정신이 없다는 최승우가, 군복 입은 청년을 보면 연평도에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아들 구본건이 그립다.
아들만 빼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름임에도 왜 이토록 살갑고 따스한 위로를 얻을까. 삶 어느 시점에서 문득 그들의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어떤 음식을 대하거나 어느 장소, 물건, 향기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너그러운 미소가 보이고, 팔도강산 구성진 억양과 다감한 목소리가 들리면 어느새 가슴이 벅차오른다. 모두 선물과도 같은 이름이다.
문득 숨이 콱 막힌다. 어느 이름에서 오는 이 막막하고도 적막한 고통, 근래 나는 몇 번이고 숨을 헐떡이며 신음했다. 상처를 준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방치했고 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를 위한 위로가 필요할 무렵, 낯모르는 이들의 위로가 전해졌다.
누런 종이로 성글게 말아 싼 인삼, 꽃대를 숨긴 산마늘로 풋풋한 마음을 전한 홍천 시인과 손수 농사지은 들깨로 짰다는 서울 청년의 들기름, 시골에서 직접 담은 된장과 간장을 보내신 공주 수필가, 달콤한 마카롱을 맡겨두고 홀연히 가신 스님, 술 익는 봄을 맞으라고 누룩을 보내주신 어느 대학의 교수님, 고춧가루‧땅콩‧대추‧조‧수수‧호두 등 갖가지 챙겨 보낸 영월 시인의 정성은 친정어머니보다 더 지극했다.
내게는 울컥 치미는 슬픔도 잠재워줄 그런 이름들이 산다. 가만가만 이분들의 이름을 불러보면 나는 어느새 난만하고 당당한 한 사람으로 세상을 유유자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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