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노숙인의 건강권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노숙인 비율 37.5%
'진료 시설 지정제'로 다양한 질환 치료에 한계
노숙인 보편적 의료 서비스 접근권 보장해야

김동은 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김동은 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서류가 있으셔야 해요." "서류는 곧 가져올 수 있어요." "지금 가져오셔야 돼요. 없으면 접수가 안 되세요." 접수대 직원과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돈을 가져와라. 돈이 없다면 누군가가 대신 내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해라. 병원의 요구는 확실하고 분명하다. 노인의 맥박이 떨어진다. 구급 대원은 노인의 침대 곁에서 발을 구른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있을 수 없다고 사정한다. 우리는 차를 돌려 다음 병원으로 향한다. 노인이 갈 수 있는 병원은 한정적이다.

소설가 김혜진이 소설 <중앙역>에서 그려낸 노숙인의 고통은 오늘도 병원에서 실제로 목격할 수 있다.

노숙인은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규칙적인 식사와 위생, 수면이 중요하지만, 그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노숙인은 마음의 병도 깊다. 가족, 친구, 이웃과 멀어진 채 섬처럼 고립된 그들을 향하는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다. 지난주 발표된 '2021년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많은 노숙인이 고혈압, 당뇨, 우울증, 치과 질환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노숙인의 비율이 37.5%에 달했다. 그렇다 보니 노숙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 우리 국민의 평균 수명은 약 82세지만, 노숙인의 평균 수명은 48세를 넘지 못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매년 300여 명의 노숙인이 거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고 있다.

늦었지만 2013년부터 '노숙인 의료급여'가 시작되어 다행이다. 하지만 '노숙인 자활 시설' 등에 반드시 3개월 이상 거주해야 급여 대상이 될 수 있어 여전히 혜택을 받지 못하는 거리의 노숙인이 많다. 또한 '진료 시설 지정제' 때문에 노숙인은 지정된 의료기관만 이용할 수 있어 그들의 다양한 질환 치료에 한계가 있다. 대구의 노숙인 지정 의료기관은 단 10곳뿐인데 구군 보건소와 공공병원 등이다. 지난 2년간 공공 의료 기관이 코로나19 방역과 치료를 전담하면서 노숙인은 찾아갈 마땅한 병원이 없었다. 정부가 최근 1년 한시적으로 노숙인 지정 의료기관을 늘렸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

물론 응급 상황에서는 노숙인도 일반 병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병원 입구에서부터 차별의 시선을 느낀다. 일부 대학병원은 가족과 떨어져 어렵게 살아가는 노숙인에게 보호자 서명이나 병원비 지불 보증까지 요구한다.

배고플 때 먹고, 아플 때 치료받고, 힘들 때 쉴 곳을 가질 권리는 누구나 차별 없이 누려야 하는 기본권이다. 정부는 노숙인도 가까운 병·의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진료 시설 지정제'를 폐지하고 의료급여 신청요건을 완화해 그들의 '보편적 의료 서비스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

노숙인이 한겨울 저체온증으로 숨지는 경우는 드물다. 추위가 아닌 우리 사회의 냉대로 인한 고독과 비참함에 그들이 죽어간다. 노숙인이 의료 기관을 이용할 때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병원 당국과 의료인의 따뜻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과 옷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다."

빈곤 퇴치 운동에 평생을 바친 조셉 레신스키 신부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때다.

김동은 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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