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친(親)러시아 성향의 사회민주당(SPD) 출신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정부(사회민주당)에서 총리실장을 6년간 지냈으며 러시아 문제를 담당한 친(親)러 인사로 분류된다. 슈뢰더를 이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 재임 때는 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대(對)러시아 외교 정책을 총괄했다.
이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지난 5일 공영방송 ZDF(체데에프)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독일)는 지난 20년간 러시아를 유럽 안보 체계 안에 편입시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길에 동행토록 하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와 상호 의존을 높이려던)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사업 강행 역시 분명한 실책이었다"고 말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또 "결과적으로 수십억유로짜리 사업이 좌초했고,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독일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면서 "독일은 이 전쟁(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막는데 실패했다. 푸틴은 오판했고, 러시아를 민주주의의 길로 이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지난 2001년 독일 연방 하원에서 연설했던 푸틴 대통령과, 지금 벙커 속에서 전쟁을 선동하는 푸틴 대통령은 구분해야 한다. 지금의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 (러시아와 유럽이) 과거와 같은 상태로 복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 하루 전인 4일 기자회견에서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나는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제국주의적 망상을 위해 조국의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몰락을 감수하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의 발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민간인 대량 학살에 대한 비난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책임론으로 확산하고 있는 와중에 나온 것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우-러 전쟁 책임론은 독일·프랑스가 러시아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탓에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 좌절됐고, 유럽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높였다는 주장이다.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2005년 취임 후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에너지·경제 의존도를 높여 놓은 때문에 유럽이 러시아를 제대로 견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분석인 것이다.
우-러 전쟁 및 민간인 대량 학살과 관련해 독일과 프랑스를 비난하는 분위기는 유럽 전역으로 번지고 있다.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틱 3국과 폴란드까지 비판 대열에 합류하는 모양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는 데 독일이 걸림돌이 되어왔다. 베를린 정치인들은 이제 독일 기업 총수나 억만장자들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여성과 아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면서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의 전면적 수입 금수 조치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취해온 독일을 비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계기로 독일 내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55% 이상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금지에 찬성하는 등 독일의 입장 변화를 촉구하는 국내외 압박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친(親)러시아 정책을 폈던 메르켈 전 독일 총리와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에 대해 가장 강력한 비난을 퍼부은 인사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3일 대국민 동영상 담화에서 "부차의 집단 학살 같은 일이 벌어진 근원을 따지고 보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메르켈과 사르코지 두 사람의 러시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불확실해졌고, 이후 14년간 계속된 (독일과 프랑스의) 러시아에 대한 양보 정책이 우크라이나 침공과 부차의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는 주장인 셈이다.
14년 전인 2008년 4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 회의에서 메르켈과 사르코지 두 사람은 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반대했다. 당시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구(舊)소련 연방에 속했거나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나라 10개국이 이미 나토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만일 그때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했었더라면 러시아의 침공과 민간인 집단 학살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는 것은 제3차 세계대전을 각오하지 않고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푸틴은 당시 서방의 소극적인 자세를 확인하고 4개월 만인 2008년 8월 조지아를 침공해 친러 분리주의 지역을 합병했다.
우-러 전쟁의 서막이 14년 전에 이미 올랐던 것이다. 독재자를 상대로 한 공포와 비겁함에 바탕을 둔 대화와 협상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참혹한 민간인 학살을 불러온다는 우-러 전쟁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도 비난을 퍼부었다.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당신(마크롱 대통령)이 지금까지 푸틴과 협상해 이뤄 낸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히틀러, 스탈린, 폴포트 같은 독재자들과도 협상을 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명분으로 올해 들어 푸틴 대통령과 10차례 통화와 대면 협의를 했다. 5년 내내 입으로만 평화와 종전(終戰) 선언을 외치면서 실질적인 안보와 전쟁 억제력 향상에는 무관심해온 문재인 정권이 오버랩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는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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