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무기대여법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독소전(獨蘇戰) 초반에 독일에 크게 당했던 소련은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분기점으로 독일군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항공기와 전차 등 장비와 병력을 효율적으로 지휘 통제하는 통신 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국과 영국이 지원한 무선통신소 3만5천 곳, 야전 전화기 38만 개, 전화선 95만6천 마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미국은 지프 7만7천900대, 경(輕)화물차 15만1천 대, 군용 화물차(스튜드베이커) 20만 대를 포함, 50만 대가 넘는 차량도 지원했다. 특히 소련 수출용으로 제작된 스튜드베이커는 내구성과 기동성이 뛰어나 소련군 전투력 증강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지원은 끝이 없었다. 항공기 연료 요구량의 57.8%, 모든 폭발물의 54%, 구리·알루미늄·고무 타이어의 50% 이상을 지원했다. 가장 결정적인 지원은 소련 철도망 복구와 신설이었다. 개전 초반의 궤멸적 패배로 소련 철도망의 많은 부분이 독일군 손아귀에 들어갔거나 파괴됐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미국은 종전 때까지 소련이 사용한 레일의 56.5%, 기관차 1천900대를 지원했다. 전쟁 기간 중 소련이 생산한 기관차는 92대에 불과했다.('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이 모두 1941년 3월 발효된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의 실적이다. 이게 없었다면 소련의 승리는 불가능했다. 소련 지도층도 이를 인정한다. 무기대여법에 따라 1941년 10월 첫 지원 프로그램이 결정되자 당시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막심 리트비노프는 '이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고 외쳤다. 스탈린도 측근들에게 같은 말을 했다. "1941~1942년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이 무기대여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독일에 대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미국 상원이 무기대여법을 81년 만에 부활시켰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무기 등 군수물자를 무제한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어를 위한 무기대여법'이다. 상원은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하원을 통과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하면 핵을 제외한 모든 무기와 각종 물자를 지원하게 된다. 81년 전 무기대여법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가 거꾸로 무기대여법의 타격 대상이 되는 역설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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