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반갑다 새책] 우연이 만든 세계

션 B 캐럴 지음, 장호연 옮김/ 코쿤북스 펴냄

영화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인간이 대략 1억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우리 존재가 시작부터 '우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진짜 우연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 단계에서부터 개입한다. 스탠포드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정자와 난자 세포는 각각 25~36개의 돌연변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아이는 평균적으로 40~70개 정도의 새로운 돌연변이를 갖게 된다.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론 다운증후군 같은 엄청난 불운을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행운을 낳기도 한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에이즈)에 내성을 갖는 CCR5 델타32 돌연변이가 그런 믿기지 않는 행운 중 하나다.

6천600만 년 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때도 우연이 작동했다. 지구가 그 정도 크기의 소행성과 부딪힐 확률은 5억 년에 한 번 정도라고 한다. 충돌 속도도 그랬다. 소행성이 30분만 일찍 왔어도 지구의 자전속도 때문에 유카탄 반도가 아닌 대서양에 떨어졌고, 30분 늦었다면 태평양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멸종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형태였을 것이고, 지금 지구의 주인은 여전히 공룡이었을지도 모른다.

진화생물학자가 '우연'을 주제로 쓴 독특한 관점의 과학책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지질학‧생물학 등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인간의 출현과 삶, 더 멀리는 지구의 생성까지 모두가 우연의 연속이었음을 보여준다. 우연은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사실상 '유일한' 요인이라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란 개념은 불편한 깨달음이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지고의 존재인 신도 아니고, 한낱 우연이라니. 그럼 이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책 말미에 과거와 현재의 유명인사들을 등장시켜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데,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아요. 운이 좋았을 뿐. 우리는 지난 145억 년 동안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운이 좋아서 80, 90년을 살면 다시는 존재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삶을 최대한 즐기세요." 272쪽, 1만6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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