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경규의 행복학교]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최경규

철학이 어려운 학문이라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철학을 한다. "왜 사는가? 어떤 삶이 잘 사는 것인가?" 삶의 이유를 묻는 자문(自問)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히들 철학의 초입에서 길을 멈추는 이유는 질문만 하고 해답을 찾는 노력까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들, 대답은 찾지 않은 채 인터넷이란 창을 통해 나와 비슷한 경우의 사례를 자신의 해답인 것처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인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지만, 갈수록 진보하는 과학 문명 앞에서 우리의 생각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네비게이션만 켜놓으면 아무 생각 없이 화살표 방향만 따라서도 목적지에 갈 수도 있고, 예전처럼 굳이 12자리 전화번호를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생각 없이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생각하지도 않는데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내 생각은 길을 잃었다. 그렇다면 우린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앞서 말한 눈에 보이는 변화된 하드웨어적인 삶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술의 발전에도 예전과 같은, 감정이라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은 어떻게 할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 시대가 갈수록 일상생활은 편해지지만, 인간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IT를 전공하여 이 분야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어느 노총각 후배가 털어놓은 고백 이야기이다. 얼마 전부터 만난 연인과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더 외로워진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세상의 모든 답을 가진 듯한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가진 그에게도 외로움이라는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외로움, 인연, 사랑이라는 문제, 현대과학으로도 선명한 답을 줄 수 없는 이 화두들은 우리 삶,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연, 누구든 인연이 생긴다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기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고요한 적막을 깨고 다시 적응해야 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일 수도 있다. 비록 큐피트의 화살이 가슴에 꽂힌 시기에는 미래에 닥칠 외로움과 이별에 대한 공포는 눈에 보이질 않지만 말이다.

사랑에 빠지면 용감해진다는 말은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세르토닌이 분비됨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사랑과 외로움은 어쩌면 극히 반대의 감정이라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을 해 본 사람은 후배의 경험에 고개를 끄떡이며 그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사람에게 네가 얼마나 열렬히 빠지는지가 뜨거운 사랑의 증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단지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말해주는 증거일 뿐이다.

프롬은 외로움이 사랑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말했다. 주위에 사람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외로움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자기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타인을 자기 안으로 집어삼키는 일이 될 수 있다. 결국, 자신만의 프레임에 함께 넣으려는 사고나 행위는 결국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관계는 오래갈 수 없을지 모른다.

똑똑하거나 사랑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자주 헤어지거나, 사랑하면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사랑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하면서도 외로워지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면 두 사람의 사랑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너무나 과도한 노력을 한다면 주는 이의 외로움이 클 수 있다. 소위 말하는 갑을 관계에 놓이게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하지만, 갑이라 생각하는 이가 을에게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것으로 해석되고 심지어 지루하고 매력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함에도 외로움이 시작된다면, 외로움이 굳어지는 시점. 생각의 중심이 타인의 이해가 아닌 자기 위주로 바뀌는 때이다. 내가 왜 외로운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와 맞지 않아 불편하여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외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외로움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숙명이므로,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외로울 수밖에 없다. 즉 외로움은 극복하고 삶에서 분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외로움은 저녁 해 질 무렵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서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처절히 뛰는 그림자를 보고 누군가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인연이 생기기도 한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한 곳에 집중하면 그것만 보인다. 아픔만 보면 희망이 가려져 보이질 않는다. 햇볕 좋은 날 돋보기로 종이를 태우듯 외로움이란 작은 불씨가 온 마음을 다 태울 수도 있다. 나의 외로움을 결핍이라는 핑계로 다른 이에게서 채우려 하지 말고, 외로움을 당당히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나는 존재함을 느끼며 데카르트의 물음에 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혹여 봄의 한 가운데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오늘이라면,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를 눈을 감고 마음으로 읽어보자.

정호승 / 시인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최경규

최경규 행복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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