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앳된 아들이 집을 나섰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어색했다. 평소 입던 체육복과 허름한 운동화 차림에 휴대폰, 입영통지서, 신분증, 나라사랑카드가 든 에코백 하나가 전부였다. 아들을 태우고 한 시간 반 남짓 달려 포항 외진 곳으로 접어들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안내하는 분들의 절도 있는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태연한 척하던 아들이 잠잠해졌다. 현실을 실감하듯 눈빛이 또렷해지고 표정도 굳었다.
마지막 고개를 넘으니 거대한 간판이 나타났다. '해병대 미래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철문 위 붉은 간판을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붉은색이 주는 위압감에 시간이 멈춘 듯 말문이 막혔다. 팔도에서 도착한 1천여 명의 청춘은 날렵해 보였다. 몸을 단련했을까. 산도 옮기고, 귀신도 잡을 것 같은 매서움과 패기가 묻어났다. 덜컥 겁이 났다. 운동이라고는 태권도 밖에 할 줄 모르는 이 앳된 아들이, 저 날렵한 청춘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입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보다 두려움이 더했다. 호루라기 소리조차 절도 있게 각이 잡혀있었다. 저 거대한 철문을 통과하고 나면,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은 공포에 가까웠다. 분단국가에 사는 국민들의 정서 밑바닥에 깔린 전쟁의 두려움이 내게도 스며들었다.
시계를 보던 아들이 시계를 풀고, 전원을 끈 휴대폰과 함께 내게 건넸다. "제 책상 서랍에 잘 넣어주세요.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먼저 눈물이 터졌다. 대한의 사나이가 되겠다며 여기까지 씩씩하게 왔거늘, 엄마의 눈물 앞에서 아들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해병대 갑니다." 입대 두어 달 전, 저녁을 먹으며 아들이 무심히 말을 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놀라움보다 화가 나 다그쳤다. 왜 하필 해병대냐고. 훈련 거칠기로 소문난 곳인데 버틸 수 있겠냐는 것이 요지였다. 아니, 솔직히 말해 누군가는 가야 하되, 내 아들만큼은 안 된다는 개인 이기주의가 들끓었다. 젊은 혈기에 객기 한번 부려보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접으라고 했다.
아들의 의지는 명징했다. "배가 침몰할 때 가만히 있다가 죽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누가 죽든 상관하지 않고 혼자만 살아나오면 좋겠어요? 아니면 누구 한 명이라도 같이 나오면 좋겠어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교육훈련단에 아들을 들여보내고 나는 매주 훈련단 사이트를 전전했다. 다른 신병의 사진을 들고 아들인 양 기쁘기도 했다. 정신교육을 시작으로 전투기술, 20kg 완전군장으로 12시간에 걸친 천자봉 행군까지 무사히 마치고 아들은 정예의 해병으로 빨간 명찰을 달았다.
훈련이 끝날 무렵 기별이 왔다. "서해 5도(島)로 자대 배치받을 것 같습니다. 지원했습니다." 말린다고 꺾일 의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아들의 뜻을 응원해줬다. 새로운 것에 도전장을 내미는 패기와 용기, 주변을 생각하는 단아한 마음이 나를 숙연하게 했다.
훈련소를 나와 후반기 교육도 없이 곧장 섬으로 갔다. 삼면이 바다인 분단국가에서 아들은 거친 서해 물살을 가르고, 제 생에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최전방 섬에 당도했다. 벌써 1년이 지났다. 연평도에 안착한 아들의 자태는 몰라보게 각이 잡혔다.
NLL을 따라 중국어선들이 진을 치고, 건너에는 북한군이 대치하고 있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들은, 제 생에 가장 큰 선택이었고, 가장 바른 가르침이라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위험한 곳 마다하지 않고 북한이 지척인 섬에서 아들은 오늘도 대한민국의 아들로 서해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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