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한 번 열어봅니다. 젊었을 시절 당신이 대구 시내 양장점에서 맞춰줬던 옷들이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옷을 새로 살 형편이 안 돼서 따로 옷을 더 사진 않고 있지만, 그 옷들을 볼 때마다 당신이 생각나서 함부로 옷을 버리지 못하고 입어보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같은 마을에 살면서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당신이었죠. 그러고보니 항상 당신은 내게 다정했지요. 언제 기차타고 영천인가 어딘가로 갈 때였나요, 지금이야 기차 창문을 열 수 없지만 그 때 기차는 창문을 열 수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기차 창문이 열려있었는데, 기차가 터널로 지나갈 때 당신은 내 얼굴에 먼지가 앉을까봐 코트를 벗어서 내 얼굴을 가려줬었지요. 그 때 뿐만이 아니라 당신은 길을 가다가도 먼지바람이 불면 행여 먼지를 맞을까봐 바로 코트를 벗어서 날 덮어주고 가려줬었죠. 그렇게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었네요.
6·25 전쟁이 끝나고 결혼할 때 참 힘들었지요. 전쟁에서 갈비뼈 쪽에 맞은 총알이 박힌 채 제대한 당신은 그 총상 때문에 늘 힘들어했지요. 상처 입은 당신을 보고 친정에서도 결혼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더 열심히 살아서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며 저희 친정을 설득했죠. 그렇게 결혼한 게 어찌보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가끔 당신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걸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줄까 생각해볼 때가 많답니다. 당신의 총상이 가볍지 않았는데 전공상 등급이 6급으로 낮게 나온데다가 나이가 드니 상이군경으로서 연금을 받는다고 노령연금 같은 다른 연금이 안 나와 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했으니까요. 당신이 나라를 위해 한 헌신을 국가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당신은 나 뿐만 아니라 4남매나 되는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늘 열심이었어요. 영화 배급 사업을 한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항상 날 챙겨줬었죠. 옷장에 있는 옷들이 그걸 알려주고 있네요. 항상 대구에 제일 좋은 양장점에 가서 몇 벌씩 맞춰줬었으니까요. 점심 같이 먹자며 사무실로 오라고 했을 때 내 모습을 보고 "제 2의 김지미가 왔네"라며 날 추켜세웠었죠.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 사랑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세상 떠날 때까지 당신은 참 낭만적이었어요. 항상 여행가는 걸 좋아했고, 나와 데이트하는 걸 좋아했지요. 나이들고 나서도 "오랜만에 칼질이나 하러 갈까?"라며 양식(洋食)을 권하며 내게 데이트신청을 하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당신이 세상을 잘 살다 갔고, 나 또한 당신 만나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건 잘 알겠어요.
당신이 언제 제일 많이 생각나는지 아나요? 밥 먹을 때랍니다. 혼자 밥상에 앉을 때면 당신과 다정하게 밥 먹던 때가 떠오르니까요.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요? 부전자전이라고 아들이 당신과 똑같이 날 대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아들도 바람 많이 부는 날이면 내가 날아갈까 코트 벗어서 챙겨주는 건 똑같이 하더군요.
아직도 당신이 사 준 옷을 지금도 입고 다니곤 해요. 그럴 때마다 당신 생각 정말 많이 난답니다. 당신과 함께 키운 자식들도 남아있는 나를 잘 챙겨주고 있어요. 멀리 떠난 그 곳에서 나 혼자 어떻게 살고 있을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난 잘 살고 있을테니 내가 갈 때 잘 맞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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