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홍성걸 칼럼] 풀뿌리 민주주의, 살릴 대안은 없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몇 달 전, 필자는 수도권 어느 도시의 작은 모임에 초청되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지방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지방선거에서의 공천 과정에 대한 현실적 문제를 지적했다. 20년 이상 현장에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도대체 공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야를 불문하고 어느 날 갑자기 당협위원장이 새로 임명되기도 하고 지역을 거의 모르는 당협위원장의 추천이 후보자 공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공천이 이루어지는 기준도 제각각일 뿐만 아니라 능력과 관계없이 엉뚱한 사람이 공천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역 주민의 어려움을 살피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들은 아예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대학원 시절, 자유민주주의의 대표적 국가인 미국 정치의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 democracy)를 공부했던 필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방자치는 그 지역을 잘 알고 지역 문제 해결에 노력해 온 지역 인재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앙 정치의 힘이 너무 커 지방선거에도 중앙 정치인의 영향력에 따른 공천이 이루어진다. 지역별로 구성된 공천관리위원회의 위원장은 물론, 위원들도 대부분 중앙 정치에서 활동하는 국회의원들이다. 공천관리위원회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공천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주요 정당일수록 공천만 받으면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현실에서 공천위원들은 때때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계파의 정치적 경로에 도움이 될 인사를 공천하려는 욕심이 크게 작용한다.

더 근본적 문제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방의회 후보자 공천은 사실상 당협위원장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당협위원장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에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후보자를 추천한다면 다행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지역에서의 공천 갈등은 사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위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지방의회는 정치 초년생들이 진출해 열과 성을 다해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장이어야 한다. 공익을 추구하는 그들의 노력이 주민들에게 인정받을 때, 그들이 자치단체의 장이나 중앙 정치로 진출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문파니 명파니 윤파니 하는 부끄러운 계파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정치인들은 계파 보스가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하게 된다.

이제 파격적인 제도 개선으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딜 것을 제안한다. 우선 중앙 정치인들을 지방선거, 특히 지방의회 의원의 공천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시키자. 선거공영제와 정당의 활동비를 세금으로 지원하는 우리나라는 공천 과정에 민주적 절차에 따른 자유 경쟁을 도입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정당들이 사실상 오픈 프라이머리 방식으로 후보를 결정하도록 하고, 이를 관리할 경선관리위원회를 두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경선관리위원회는 문자 그대로 경선을 관리만 할 뿐, 후보자의 선정에는 관여할 수 없어야 한다.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갖추었느냐를 판단하기 위해 이번에 국민의힘이 실시한 공천자격시험 같은 기본적 적성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경선에 참여하여 경쟁할 수 있도록 한다. 1차 경선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혹은 다수 후보를 공천해야 할 경우에는 결선투표 방식이나 순위에 따라 공천자의 수를 결정하면 된다. 이런 방식이 제도화되면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정치인들이 중앙 정치로 진출할 기회가 열릴 것이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 젊은 인재들이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계파의 보스에게 충성하지 않고 처음부터 국민에게 충성하는 정치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무엇보다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열심히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노력해 온 사람이 누구인 줄 알아야만 경선에서 후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광역이든 기초든 대개 단체장에게만 관심이 있고 지방의회의 후보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면 어떤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유권자의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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