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피소드로 읽는 전쟁 톡톡] 핏빛 숨어 흐르는 역사의 강 남천, 영천전투

영천전투에 참전한 국군장병들이 승리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영천시 제공〉
영천전투에 참전한 국군장병들이 승리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영천시 제공〉

포항 죽장에서 발원한 자호천이 영천시가지로 흘러들면 남천이라 불린다. 그리고 청푸른 여울을 남기고 서쪽으로 틀면서 북천과 북안천을 만나 강폭을 넓힌다. 금호강을 이루는 것이다.

조양각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남천은 영천의 전쟁사를 오롯이 기억하는 역사의 강이다. 10세기에는 견훤이 강력한 군마를 앞세우고 경주를 위협했지만 남천을 두른 금강산성은 영천을 지켜낸다. 임진왜란 때도 다르지 않았다. 1592년 7월, 영천고을의 사민들이 뭉친 '창의정용군' 앞에서 영천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천여 명의 왜군들은 무릎을 꿇는다. 남천에 몸을 의지한 공성전투의 승리였다.

또한 핏빛 물색을 안으로 재우고 유유히 흐르던 남천은 을사늑약에 항거한 산남의진의 정환직 의병장의 처참한 주검을 덧새겨야 했다.

그리고 40여 년 뒤, 북한군이 영천으로 밀려들자 풀잎처럼 쓰러져간 국군 전사자 앞에서 남천은 의분을 참지 못한다.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 동안, 영천을 지키던 국군 8사단은 북한군 15사단과 죽음으로 맞서 싸웠다.

전쟁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 사이에 국토의 90%와 7만여 명의 병력을 유린당한 전쟁지도부는 낙동강까지 밀려난다.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부산을 사수하려 했다.

이즈음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신속하게 대구를 포위 섬멸하고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소위 8월 공세계획을 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과 화력을 낙동강방어선을 뚫는 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부산을 조기에 점령한다는 목표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북한군은 15사단을 다부동전선에서 영천 방면으로 전환하고 대구를 우회 공격하기로 하였다. 9월 2일, 의성을 거쳐 죽장 입암-남천 상류-영천으로 진군한 북한군은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출, 낙동강방어선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영천대첩비
영천대첩비

국군 8사단은 영천 동북방 보현산과 남천 상류 일대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의 보급로와 퇴로를 힘겹게 차단하고 있었다. 전투는 피아간 필사적이었다. 국군 8사단은 혼신을 다해 분전하였으나 축차적으로 방어선이 무너졌고 결국 북한군은 남천을 건너 영천시가지로 들어서게 된다.

늦여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구월 초엿새 새벽부터 9일 동안 북한군 15사단과 접전한 국군 8사단은 영천 탈환에 사력을 다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낮에는 화력으로 밤에는 백병전으로 맞섰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온 산천에 곡소리가 따라 들렸다.

북한군과 국군이 밤낮을 번갈아가면서 전세가 뒤바뀌기를 수차례 거듭하는 동안 온 거리 위에는 시체가 널브러지고 민가와 상가는 물론 공공기관도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주인을 잃은 남천은 핏빛으로 흘렀고 초가을의 강바람마저 총성에 부딪쳐 흩어지며 비참함을 더했다.

치열한 공방 끝에 국군장병은 북한군 15사단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9월 10일 새벽, 자호천이 굽어내리는 영천의 동쪽 대의동과 조교동 일원 능금밭에 국군의 포탄이 집중됐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북한군 지휘관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숨 가쁘게 말을 달려 도망치는 장수의 실루엣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국군 병사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누다 애잔함에 거두었다. 그런데 그 도망자가 곧 북한군 15사단장(박성철)이었음은 훗날에 알게 된 사실이다.

아아!! 청사에 길이 빛날 장한 일이여! 영천을 탈환한 8사단 장병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했다. 순간 속에 영원이 존재함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국군은 여세를 몰아 남천의 동서남북 전투지역에서 모두 승전보를 이끌어낸다. 영천전투의 승리는 전략적으로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내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9월 공세를 무력화시킨 전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낙동강전선의 마지막이 된 영천전투는 곧 전쟁 발발 이후 줄곧 수세에 몰리던 국군이 공세전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는 도시가 적지 않다. 그 강은 도시 혹은 나라를 지키는 천혜의 방어선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지도자는 저마다 공방에 유리한 강을 차지하려 한다. 1차 대전 때 마르느강을 지켜낸 프랑스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 또한 폴란드의 아름다운 휴양지인 마주리안호를 활용하여 러시아를 좌초시키지 않았던가.

전쟁사는 강을 지키지 못한 도시는 적진에 빼앗긴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알려준다. 강은 도시를 지키는 생태 그 이상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연둣빛 봄날을 안은 남천이 흐른다. 조양각 앞을 돌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흐르면서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며 간다. 긴 세월 여러 무늬의 얼룩을 간직한 채 변함없이 흘러간다. 영천지역민들의 생기와 평화를 지키는 부적 같은 여울 무늬를 그리면서….

김정식
김정식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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