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대한민국 정치 지도의 양 극단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서 있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으며 엇갈린 희비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치러진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며 재차 엇갈렸다.
이 시기 한국 현대사를 먼 훗날 사극으로 만든다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희비의 쌍곡선이 주 배경이 될 것이다.
접점을 모색하기는커녕 되레 점점 멀어지는 특성이 있는 쌍곡선을 타던 두 사람은, 그러나 여생은 서로 꽤 가까운 곳에서 보내게 됐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착한 '달성 사저'(대구 달성군 유가읍)와 곧 문재인 대통령이 입주할 '양산 사저'(경남 양산시 하북면) 간 거리는 불과 58㎞이다. 달성군이 TK(대구경북) 최남단에 있어 경남과 접해 있는 데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가 달성 안에서도 꽤 남쪽에 있고, 반대로 문재인 대통령 사저는 양산 북쪽 끝 지역에 지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거리다.
이 거리는 '쿠데타 동지' 전두환 전 대통령·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저가 서울 연희동 한동네에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남극과 북극쯤, 아니 화성과 금성쯤에 떨어져 사는 것 같던 두 거물 정치인이 비슷한 날씨 예보를 공유하는 한두 시·군 건너에 이웃하게 된 것이라 상징적이다. 좁혀진 거리만큼 우리 사회의 분열도 줄어들 수 있을까.
실은 물리적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닐 터다. 정치권에서는 무대 뒤로 퇴장한 배우가 극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무대의 흑막이 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사저 정치다.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에도 선거 출마 등 중요한 행보를 앞둔 유력 정치인들이 설날에 찾아가 세배를 했고, 이게 사진과 글로 꾸며져 세간에 알려졌다. 최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달성 사저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1 지방선거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 출마한 측근 유영하 변호사의 후원회장으로 나섰고 지지 영상에도 등장했다.
다행히도 이제는 어떤 정치인이 전직 대통령 사저에 세배하러 간다고 하면 비판의 눈초리가 먼저 쏟아지는 시대가 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 정치 첫 시도 역시 유영하 후보가 경선에서 떨어지며 보기 좋게 불발됐다. 이는 곧 양산 사저로 이사를 할 문재인 대통령이 참고할 유익한 선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전직 대통령 사저의 존재감이 완연히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전직 대통령의 존재 자체만으로 여론이 끊임없이 시선을 집중하고 이야기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땐 하나의 사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하나만 주목됐으나, 이례적으로 이번 윤석열 정부에서는 두 전직 대통령의 사저가 함께 조명을 받게 됐다. 오히려 전직 대통령 사저의 존재감은 더욱 치솟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중요해지는 건 친박별에서 온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문별에서 올 예정인 문재인 대통령의 '슬기로운 사저 생활'이 아닐까. 마침 두 사람은 곧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서 조우할 예정이다. 만나서 미소 지으며 악수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고 분열의 시대가 해소돼 통합의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나 당신이나 이제 한물갔으니 각자 사저에서 슬기롭게 처신하며 삽시다'라는 내용의 텔레파시는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반드시 교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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