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성공하기 어려운 산업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종이로 만든 사전을 펼쳐 무언가를 찾아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전자사전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던 당시 여자친구에게 최신형 전자사전을 선물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사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안에는 무언가 두툼함이 담겨야 하는데 그런 익숙한 감정이 없으니 도무지 사전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전자사전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예상이었다.

아마 그때, 나 역시도 그 감정에 수긍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책장에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이희승판 국어大사전'이 꽂혀 있었으니까.

어릴 적 나는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ㄱ~ㅎ까지 차례로 백과사전을 읽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라 읽을 것이 귀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백과사전을 읽던 시절, 이미 서울에서는(비록 나는 지방중소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63빌딩이 문을 열었고, 또 한 해 후에는 개국 이래 가장 큰 행사였던 86아시안 게임이 개최됐다. 대한전기에서 생산한 (여닫이가 달려 있던) 흑백TV를 치우고, 금성 마크를 단 말끔한 컬러TV를 집으로 들여왔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 TV 옆 새로 짠 책장에 서른 권짜리 '올 컬러판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어쩌다가 백과사전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으레 사전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물론 TV도 틀어 놨다. 총천연색이 주는 눈의 피로감도 잊은 채 나는 컬러 TV와 올 컬러 백과사전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봤다. 뜻한 바 있어, ㄱ부터 차례로 읽어나가자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지막 30권의 책장을 펼친 것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어떤 6월의 '선언'으로 인해 온 세상이(물론 내가 살던 곳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TV속 세상이다.) 떠들썩할 즈음이었다. 올림픽이 한 해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6학년이 돼 있었으며, 곧 도시로 이사를 가야할 터였다. 마지막 책이라 그랬던지 나는 여느 때보다 훨씬 꼼꼼하게 사전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어떤 '표제어' 하나. 그 단어는 마치 그 백과사전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스칸디나비아 3국이나 티베트의 구게 왕조나 혹은 그 어떤 '선언'처럼 어린 나에게 낯설고 뜬금없는 것이었다. 그 표제어에 해설을 단 학자는 확신에 찬 듯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명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해설 탓인지 당시 나는 그의 의견에 강한 동의를 표시했으며 지금도 그 마지막 구절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홈쇼핑은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산업이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