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동영상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진 한 장이 주는 울림은 동영상의 그것을 능가할 때가 많다. 특히 보도사진의 경우 사진 한 컷으로 사건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본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는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진기자들이 있고, 터지는 플래시와 찰칵거리는 셔터소리 속에 찰나의 순간이 기록으로 남는다.
1960년 매일신문에 입사해 36년간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며, 정년퇴직 이후에도 항상 카메라를 놓지 않고 사는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또한 그랬다. 농민들이 모를 심는 현장에도, 돈과 막걸리가 오고가는 선거유세장 속에도, 열차 추돌사고로 승객들이 사경을 헤매는 사고장소에도 권 전 기자의 카메라 셔터 버튼은 늘 찰칵거리며 현장을 기록했다.
권 전 기자는 지난달 그의 사진기자로서의 인생을 집대성한 사진집 '사진으로 기록한 역사의 현장'을 발간했다. 책 속의 담긴 사진 중 권 전 기자가 가장 애착이 간다는 사진들을 통해 사진기자 혹은 사진쟁이로 살아온 권 전 기자의 삶을 들어볼 수 있었다.
◆다급한 연락을 받고 입사한 후 찍은 첫 사진
권 전 기자가 사진과 인연을 맺은 건 중학생 때였다. 당시 자형이 운영하던 사진현상소에서 일을 도와주던 것을 기점으로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중학교 내 사진동아리 부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사진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사진과 인연을 맺어가며 고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한창 서울 북한산 백운대까지 등산하고 내려온 뒤였어요. 당시 자형이 현상소와 함께 매일신문의 사진부장을 함께 하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연락을 해서는 대구로 내려오라는 거예요. 내려와보니 자형은 '사진부 인력이 한 사람 비어서 급히 인력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했고, 저는 당연히 도와드려야겠다 싶어 수락했죠. 그게 제 사진기자 인생의 시작이었어요."
내려오자마자 일을 시작하게 된 권 전 기자는 입사하자마자 바로 사진을 찍으러 가야 했고 그리해서 처음 촬영한 사진이 1960년 6월 9일자 매일신문 1면에 실린 '권농일 모심기' 행사 사진이었다.

◆10년 간격으로 보도사진상을 안긴 두 사진
1971년 5월 14일 매일신문 7면에 실린 '나도 한 잔'이라는 사진은 그 해 보도사진전에서 동상을 차지했다. 제 8대 총선 선거전이 뜨겁던 청도의 공화당 유세 현장에서 공화당 사람들이 막걸리 등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었다.
"그 때 청도에 김종필 당시 공화당 부총재가 내려와 지원유세를 했었어요. 유세장 앞은 이미 누군가가 준비해 놓은 막걸리로 판이 벌어져 있었죠. 현장을 계속 보고있는데, 어린아이 한 명이 주변을 왔다갔다 하더니 막걸리를 마시던 어른 옆에서 같이 막걸리를 마시더군요. 그래서 바로 셔터를 눌렀죠."
어린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막걸리를 들이키는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신문에 실리기까지 마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촬영을 한 뒤 당직자가 눈치챈 것 같아 얼른 필름을 감아선 취재차량을 운전한 기사에게 건네줬고 새 필름을 갈아끼웠죠. 공화당 당직자들은 저녁까지 취재기자와 제게 맥주를 사면서 사진을 싣지 말라고 말렸고 중앙정보부에서도 압력이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 사장님이 이를 막아주셔서 사진이 실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촬영하고 10년이 지난 1981년 5월 14일. 경산 열차추돌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권 전 기자는 사고 현장 속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안고 울부짖는 아이를 찍은 사진으로 그 해 보도사진전 금상을 차지한다. 이 때도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권 전 기자는 특종 사진을 만들어냈다.
"그 때 하필 사진부장은 동남아 여행 중이라 자리를 비웠고 나머지 기자들은 취재 때문에 카메라를 챙겨가면서 회사 안에 남아있는 카메라가 없었어요. 급히 36장짜리 필름 한 통과 인근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급히 빌려 사고 현장으로 택시를 타고 내달렸죠. 필름도 한 통 밖에 없었으니 신중하게 한 컷 한 컷 찍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건진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에요."
이 사진을 계기로 사진 속 어린이였던 지용제 씨는 어른이 된 뒤에 권 전 기자를 만나게 됐고, 권 전 기자가 지 씨 자녀의 돌잔치에 초대받기도 하는 등 계속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 "마지막까지 카메라 놓지 않고 싶다"
사진기자로 취재현장을 누비는 와중에 외압 또한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권 전 기자는 이를 이겨내고 현장을 담았다. 한 예로 1981년 10월 22일 경찰의 날에 대구 동부경찰서 직원 200여명이 시민들에게 사죄의 큰 절을 올리는 사진은 치안본부(현 경찰청) 측에서 사진을 싣지 말아달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었다. 당시 한 경찰이 사건 피해자의 돈을 훔친 사건으로 경찰이 구설수에 오르던 때에 경찰의 위신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던 때였다.
권 전 기자는 매일신문 사진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매번 뜨거운 열정으로 현장을 누벼왔다고 자부한다. 일에 매달려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못 간 것부터 시작해서 곧바로 현장을 가야하는 상황에 대비해 집 또한 신문사에서 100여m 근처인 곳에 구해 살기도 했다고. 주말마다 출근해서 일한 건 자랑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권 전 기자는 활동 중인 후배 기자들에게 "항상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좀 더 분발해줬으면 좋겠다"고 충고한다.
지금도 권 전 기자는 틈만 나면 자택 근처에 있는 수성못에 가 사진을 찍는다. 5년 전 구매한 카메라의 줌 기능이 잘 되지는 않지만 기자 시절에도 35㎜ 렌즈를 이용해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에 괜찮다고. 권 전 기자는 "나이 80이 넘었지만 아직도 카메라를 놓고 싶지 않다"며 "인생의 제일 큰 목표는 죽기 전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