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아이들아, 너희들의 세계를 살렴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시골 학교. 족히 백 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고목이 한 그루가 서 있다. 바람이 불면 나무에서 이따금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나무가 운다고도 했고, 누구를 부른다고도 했다. 6학년 형식이 말로는 이 나무에 수호신이 살고 있어서, 누가 학교에 해코지하거나 나쁜 짓을 하면 나무 신이 끝까지 쫓아가 벌한다고 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누구는 동생을 울렸다가 나뭇가지에 맞았다고 했고, 또 누구는 시험 커닝을 한 후 나무가 "이놈"하고 호통치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아이들은 고목에 깃들었다는 신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스스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곤 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나무는 커다랗고 짙은 그늘을 운동장에 내렸다. 종이 울리자 교실을 잽싸게 빠져나온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무 아래로 몰려왔다. 보폭이 크고, 몸이 재빠른 6학년 형식이 뒤로 도원이, 종현이, 나래, 예름이, 가은이, 민지 그리고 아무리 힘껏 달려도 늘 꼴찌인 1학년 영훈이까지. 아이들을 따라 흙먼지도 보얗게 일었다.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나무 아래 가방을 던졌다. 여자아이들은 주로 그네나 시소로 갔고, 남자아이들은 정글짐이나 철봉에 가 몸을 올렸다. 먼저 도착한 상급생들이 재빠르게 놀이기구를 장악했다.

뭣에서든 늦고 서투른 영훈이는 오늘도 풀이 죽었다. 형, 누나들이 놀이기구를 내어줄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다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끝내는 교정이 떠나갈 듯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영훈이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형, 누나들이 일제히 영훈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영훈아, 그네 탈래? 누나가 밀어줄게." 나래와 가은이가 영훈이를 그네로 데려가자 이번엔 정글짐 꼭대기를 장악한 형식이가 질세라 영훈이를 불렀다.

"영훈아, 형아가 저 꼭대기 비켜 줄게. 저기 올라가면 네가 우리 중에 최고 대장이 되는 거야."

아이들은 영훈이를 달래는데 정성을 다했다. 형식이 형의 호의를 받으며 정글짐을 오르는 영훈이 얼굴엔 금세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가끔은 엉뚱한 행동으로 어른들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저들만의 세계에서 가장 선하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저 막연하게 '착한 아이'이기만 바라는 어른들의 시각은 어쩌면 아이들의 완벽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글게 살아온 어린 날들이 성근 어른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에게 뜨겁고 완벽한 지금을 마음껏 살다 오라고, 기다려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리라.

'빵빵~' 노란 버스가 교정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정글짐 가장 위에 영훈이는 또 혼자 남겨졌다. 영훈이는 울지 않고 정글짐에서 내려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 저 멀리서 형, 누나들이 달려왔다. "영훈아, 천천히 내려와. 아저씨께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렸어."

아이들이 떠난 교정, 활짝 열린 가방에서 몽당연필, 지우개가 빠져나와 고목 아래 남았다. 바람이 불자 커다란 이파리 하나가 몽당연필, 지우개 위에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나무 할아버지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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