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꼰대' 예찬

어른들의 관심과 애정 막연한 '꼰대짓'으로 치부되어선 안돼

임상준 경북부 차장
임상준 경북부 차장

#1. 2022년 5월. '안녕~ 주말 잘 보냈어?'

밝은 인사 한마디에 바로 '꼰대'가 돼 버렸다. '사생활을 왜 물어봐, 꼰대짓'. 젊은 직원 단톡방은 냉정했다. 싸늘하다. 친해지려 '인사광(光)'을 팔았건만 '독박'만 썼다. 이제는 아래 직원들에게 인사하기가 망설여진다.

#2.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제17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밴 감동 드라마에 세계인은 열광했다. 하지만 우리는 올림픽 후유증을 꽤 오랫동안 앓아야 했다. 당시 '썰렁하다'란 말이 유행했고, 아무리 재밌는 개그를 쳐도 "워~~ 닭살, 썰렁해~" 한마디면 금세 썰렁(?)해졌다.

'썰렁'과 '꼰대'란 말은 '성의 있고 재미난 일도 별로 달갑지 않은 것'으로 변질시킨다. 물론 '썰렁한 개그'와 '꼰대짓'은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현상을 두고 가타부타 없는 맹목적인 어휘 남발로 본질을 왜곡시키곤 한다.

언어학자들은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봤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는 "사람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고 했다. 언어가 현상을 일정한 프레임에 가둔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진심 어린 관심과 충고도 '꼰대'란 단어 앞에서는 '꼰대짓'이 되고 '배꼽 빠지는 개그'도 '썰렁한 이야기'로 치부된다.

하지만 인류가 이러한 '꼰대짓'이 있었기에 발전했다면 과장일까?

우리가 사는 오늘은 세대 간 지혜가 모이고 축적을 통해 이룩한 '유산'(遺産)이다. 선대의 가르침,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있었기에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게 됐다. 운전자 없는 자동차 시대도 도래했다. 세대 간 '전승(傳承) DNA'가 인류를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게 한 동력이었다.

언제부턴가 '꼰대'란 언어에 갇혀 축적의 시간이 늘어지고 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노인은 청년에게 삶을 가르치고 노하우를 전해 주길 망설이게 하는 '펜스 룰'이 쳐지고 있다. '꼰대' 소리 듣는 게 두려워 충고와 지혜를 나누길 꺼려하는 '전승 검열 시대'에 살고 있다.

'꼰대'들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

앞서 산 '꼰대'들은 독일의 막장에서, 월남의 밀림에서 '달러'를 벌어들였다. 또 그 땀과 핏값으로 '밥 먹듯 굶는 가난한 변방의 나라'를 번듯한 코리아(KOREA)로 일궜다. 꼰대 덕에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삼성과 엘지, 현대자동차가 있는 '쪽팔리지 않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꼰대'가 없었다면 단군 이래 가장 잘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그 과실은 온전히 따 먹으며 '꼰대'란 비아냥거림으로 사회 분위기를 몰고 가선 안 된다.

이순신 장군은 수백 척의 왜선을 등지고 병사들에게 '사즉생'(死卽生·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을 외쳤다. 만약 이때 갑옷과 수모를 쓴 2030 수병들이 장군의 연설을 '꼰대짓'으로 생각했다면 '명량해전'이나 '한산도대첩'은 역사서를 장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Theodore Roethke)는 말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 나오는 대사로도 유명한 이 말을 한번 새겨 봄은 어떨까?

"살아 봐야 알아지는 게 있더라"라는 어느 노학자의 말처럼 나이는 분명 제값을 한다. 어버이날을 앞둔 푸르른 오월의 어느 날, '신록 예찬'에 앞서 '꼰대 예찬'부터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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