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은 서세옥의 '벽영롱'은 돌 그림이다. '푸르고 영롱하다'는 벽영롱 세 글자에 모두 들어있는 '구슬 옥(玉)'자에 구슬처럼 동그란 점을 찍었고 글자마다 곡선 획이 있는 조형성이 풍부한 글씨다. 제목처럼 쓴 돌 이름에 이어 부채꼴 테두리를 따라 제화를 둥글게 이어서 쓴 다음 세로로 마무리했다.
'여애석삽년(余愛石卅年) 족편우내(足遍宇內) 탐수무유(探搜無遺) 궤탑원림지간(几榻園林之間) 대소제품림립(大小諸品林立) 황약신거신선동학(恍若身居神仙洞壑) 흥고림지(興高臨池) 료작차일(聊作此日) 상두즉경(床頭即景)'
'내가 돌을 좋아해 삼십년 동안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남김없이 다 찾아보았다. 서재와 정원에 크고 작은 여러 품등의 돌이 숲을 이루며 서있어 황홀함이 마치 내 몸이 신선의 동네에 있는 것 같다. 흥취가 고조되어 벼루에 임해 이렇게 눈앞의 책상머리 광경을 그린다.'
돌을 사랑하고 수집하는 벽이 있다고 했다. 삼십 년이나 애석하며 실내의 작은 청완품에서부터 마당의 정원석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명품을 손에 넣었다고 자부했다. 책상머리의 이 벽영롱을 더욱 사랑한 것 같다. 자기 고백적인 글의 내용이나 그림과 글씨의 붓질로 보아 취필(醉筆)일 것이다.
돌에 이름을 지어주고 수집하며 돌덩어리를 미적 대상으로 여기는 심미의식과 애석 취미가 문화적 현상을 이루게 되면 거슬러 올라가 선구자를 꼽기 마련인데 중국 북송의 미불이 애석가의 원조이다. 미불은 멋진 바위를 만나자 의관을 차리고 절하며 '형(兄)'이라고 했다. '석장(石丈)'이라는 기록도 있다. 기암괴석을 추앙해 형님으로 불렀다는 이 일화가 미불배석도(米芾拜石圖)로 그려진다.
서울 성북동 언덕 솔숲에 무송재(撫松齋)를 짓고 살며 산지기라는 산정(山丁)으로 호를 썼던 서세옥은 대구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고서화와 고서가 많은 환경에서 자랐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가 그림을 배우다 1949년 서울대에 미술대학이 생기자 제1회화과(동양화과)에 입학해 교수인 근원 김용준의 감화를 받았다. 서세옥은 육이오 중 월북한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老柿山房)을 찾아가 마당에 있던 괴석을 어렵사리 자신의 집으로 옮겨왔다. 주인은 바뀌어도 그대로인 돌에서 자신 이후의 주인을 생각하며 불멸에 대한 동경을 돌에 부쳤을 것이다.
돌을 사랑한 서세옥은 돌 그림을 즐겨 그렸다. '벽영롱'은 자작의 글, 그림, 글씨, 인장이 혼연한 가운데 수묵의 찰나적 표현성과 필묵의 추상적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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