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그리하여 꽃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대학병원 한켠에 커다란 꽃그릇이 놓였다. 노랗고 파란 비올라 팬지가 가득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앙증맞은 몸을 파르르 떨며 사방으로 향기를 흩는다. 홀린 듯 다가가 코를 바투 민다. 유연한 향기에 절로 눈이 감긴다. 몽환으로 부풀어 오르는 시간, 실체를 잊고 저 허공 어디까지 가볍게 따라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육신이든 마음이든, 아픔을 지닌 채 여기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향기를 좇아도 좋으리.

'꽃'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 탐욕은 없고 온화하고 선한 것만 깃든 듯하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을 어떤 세계처럼, 꽃은 묘한 심리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꽃은 사람을 대신해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꽃에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향기를 읽고 해석하는가 하면, 색깔이나 자태, 피고 지는 시기조차 그냥 두지 않았다. 새기고, 그리고, 쓰며 꽃에 심취했다. 감사를 전하고, 기쁨을 나누거나 사랑을 고백할 때도 꽃을 앞세운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피고 또 피며, 꽃은 세상을 환희와 희망으로 들뜨게 한다. 그러나 어떤 꽃에는 침체된 우울과 슬픔을 모조리 묻기도 한다. 두렵고 서늘한 이별 앞에 꽃은 눈물을 대신했다.

어디 그뿐이랴. 무심히 피었다 지는 꽃마저도 집착하고 의지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몇 년 만에 꽃이 피었다며 환호성을 지르는가 하면, 떨어진 꽃잎마저 행운이 깃들었다고 호들갑이다. 귀한 꽃이 피었으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는, 꽃에게 무조건 '좋은 일'을 가져와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우곤 했다. 그런 주술적 기대는 꽃을 학대하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한때 꽃은 사치라고 여겼다. 꽃이 '꽃'으로 불리는 시간은 잠깐이었다. 지는 꽃이 서글펐다. 꽃이 제빛을 잃고 시들어가는 것이 초라했으므로, 지위와 품위를 잃어버린 누군가의 비참한 최후를 보는 것처럼 아팠다. 꽃에서 귀족적 우아함만 보고자 했던 내 어리석은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도 꽃은 가뭇없이 피었다. 꽃의 경계는 모호해서 정확한 계절,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를 두지 않았다. 꽃에 기댄 날들은 스스로 왔고 스스로 가 저문다. 가뭇없이 저무는 꽃을 두고 애써 아파하거나 서글퍼하지 말자고 스스로 위로했다.

꽃이 진다. 올해는 유난히 빨리 저문다. 어쩌면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스스로 목을 꺾는 꽃의 극단일지도 모른다. 꽃은 자신의 행적을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으며, 잊지 말라는 당부도 남기지 않는다. 결코 무겁지도 어둡지도 않은 제 생(生)을 위해 오늘도 무심하게 꽃이 진다. 때로는 아프고, 서럽고 허허롭고 슬프다 할지라도, 꽃은 꽃으로만 보자. 저들만의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 가도록. 그리하여 가장 허약하고 아스라한 가지 끝에 꽃이 피었다 한들, 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툭 삶을 꺾고 가뭇없이 저문다 한들, 우리 슬픔을 말하지 말자.

나직나직한 꽃들의 흔들림, 나는 한철 기도처럼 꽃을 본다. 어수선한 동공에 꽃이 저문다. 황망하게 꽃이 저문다고, 슬프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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