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아고라(Agora)로 가 보자. 아고라는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던 너른 마당이다. '아고라조'(Agorazo·물건을 사다)가 어원인데서 알수 있듯이 원래는 장터다. 점차 정치집회도 열고, 체력 단련장으로도 썼으니 공적 목적의 장소다. 각종 관공서도 여기에 자리했다. 아고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판아테나이카 도로에 서면 소크라테스가 제자 플라톤과 인생을 논하며 걸었을 장면이 그려진다.
르네상스의 3대 화가 중 한 명 라파엘로가 바티칸 교황청 서명의 방에 그린 벽화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도 디졸브된다. B.C 490년 페르시아 전쟁 기간 중 마라톤 전투 승리를 알린 페이디피데스 역시 판아테나이카 도로를 헐떡여 달리며 오늘의 마라톤을 낳았다. 이처럼 아테네는 2천 500년 전 시간이 박제된 도시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21세기 지구촌 학문, 문학, 예술, 문화 각 분야의 정수는 B.C 5세기 아테네에 뿌리를 둔다. 그러니 아테네는 오래된 현재요, 다가올 미래다. 민주주의와 연계된 정치 분야도 마찬가지다.
아고라 판아테나이카 도로 옆에 아탈로스 스토아가 자리한다. 헬레니즘 시대 강국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2세가 젊은날 아테네에서 유학하며 공부한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B.C 150년쯤 큰 돈을 들여 지어준 건물이다. 오늘날 보는 새물내 물씬 풍기는 아탈로스 스토아는 미국이 1956년 복원해준 덕분이다. 이 아탈로스 스토아 앞에 검푸른 이끼 가득 덮인 낡은 돌 받침 같은 연단이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베마'(Bema)라고 부른다.
B.C 621년 드라콘의 법치개혁부터 시작해 B.C 462년 에피알테스의 민주개혁까지 160년 세월을 거치며 단행된 4차례의 권력 분산 개혁의 성과물,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 상징이 바로 베마다. 자유시민이면 누구나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 에클레시아(Eklesia) 회기 중에 이 베마에 올라 평등하게 발언할 권리를 가졌다. 베마에 오른 주권자들의 자유로운 논의와 표결로 국가의 모든 법률과 정책이 결정됐다.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은 바로 이 국민(Demo)의 정치(Cracy)에서 나왔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서구사회에서 복원된 민주주의는 주권자가 대표를 뽑아 법률과 정책을 결정하도록 맡기는 간접 민주주의다. 절대왕정을 휘두르던 왕한테서 권한을 빼앗아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정치체제다. 2016년 영국은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로 결정했다. 이제 서구 민주주의의 지향점은 간접 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이행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권자는 국민인 만큼 그 어떤 조직이나 권력도 국민의 직접 정책결정권을 침해할 수 없다. 이런 민주주의 정신을 무시하고 국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검수완박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법무부와 검찰이 헌법 제111조에 의거해 제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검수완박 법안 권한쟁의심판이 헌법재판소의 친 민주당계 재판관들에 의해 기각되더라도 큰 문제 없다. 주권자인 국민에게 직접 묻는 제도적 장치가 헌법에 엄연히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주권재민의 헌법정신과 아테네 이후 2천500년 뿌리 깊은 직접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검수완박 찬반 국민투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킬 호기다. 칸트식으로 해석하면 선택이 아닌 당위(當爲·Sollen)이자 그 자체로서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 윤석열 대통령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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