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문화는 언어 중심 문화이지, 시각 중심 문화는 아니다."라고 했다. "문학 덕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지만, 미술이나 음악은 영 아니다"라고도 했다. 영국인 문화인류학자 케이트 폭스의 말에 나는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이 떠오르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고 보니, 패션 감각이 뛰어난 옷 잘 입는 영국인을 본 적이 없다. 영화 속 절제된 대사가 엄청 멋졌던 것도, 마차 타던 시절 여주인공의 편지 쓰는 장면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도 다 수긍이 갔다.
영국인은 감정표현이 별로 없다. 다른 서양인처럼 잘 껴안지도 않고, 몸짓이나 손짓도 많지 않고, 얼굴표정도 잘 변하지 않는다. 의사전달은 말에 의존한다는데도 말수도 적다. 그래서 다가가기 어렵고 차갑고 쌀쌀맞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들은 영국인의 멋진 말들이 생각난다. 공항에 가면서 택시를 탄 적 있다. 도로가 막혀 걱정됐는데 기사도 그랬나보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약간의 무례를 범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의아했다. 내가 눈알을 굴리는 사이, 그가 슬며시 앞차 앞으로 끼어든다. 아니, 끼어드는데도 양해를 구하다니! 몹시 신사다운 느낌이 들면서, 작은 일인데도 입이 크게 벌어졌다.
깊게 파인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86세라서 놀랐는데, 지금도 풀타임으로 일한다고 해서 또 놀랐다. 나이 잘 드는 비결을 묻는 내게 "I don't advertise my age.(나이는 광고하지 않는다.)"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늘 관심을 잃지 말라."고도 한다. 게다가 더 경이로운 나이의 90세 여인은 "몸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며, '애티튜드'를 강조한다. 툭하면 '나이'를 끄집어내고 '건강이 제일'이란 말만 듣던 나는 그 말들이 마음에 들었다.
화창한 일요일에 공원을 산책했다. 건너편에서 걷던 할머니가 미소 띤 얼굴로 내게 말했다. "Enjoy the small amount of sunshine!(적은 햇볕이니 즐기라!)"고. 해가 귀한 영국에서, 낯선 이와는 말을 섞지 않는 영국인이, 처음 본 외국인에게 다가와 알려준다. 적은 것에 만족하고 누리라는 말이 깊고 좋아서 나는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
때로는 언어가 삶을 안내한다. 나는 오늘도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영국인은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줄여서 말한다.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낮춰서 이야기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희귀병으로 급작스레 온몸이 마비되고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됐다. 놀라서 달려온 아내에게 그가 어렵사리 뱉은 말은 "a bit of bother(조금 성가신 일)"이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고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속뜻이 들어 있고, 말하지 않아도 속뜻을 알아챈다. 힘든 시간을 풀어내는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감탄스럽기도 하다.
친구 스텔라가 원치 않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꽤 오랫동안 뭔가를 권하는 데도 그는 내내 정중하다. 처음에는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라며 사양하더니, 중간에는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마지막에는 "나중에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거다."라면서 거절한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흐트러짐이 없다. 거절까지도 '우아하고 상냥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거였다.
언어가 삶과 직결되어 있고, 언어가 말하는 사람의 면모임을 깨닫게 된다. 말은 생각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 나를 진심으로 기쁘게 한 것이 선물이 아닌 나를 아끼는 말이나 나를 인정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나에게 깊이 상처로 남은 것이 그가 한 행동이 아닌 그가 한 말일 수도 있다.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 말일 수도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봤다. 미국인 수상자가 복받치는 감동과 심심한 감사를 일일이 표현하느라 인사가 길었다. 이어서 영국인 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앞에서 이미 다 말했으니, 더 말할 게 있겠느냐?"는 그의 첫마디가 몹시 '영국인다워서' 나는 혼자 웃었다.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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