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전력선진국과 인명존중

류성훈 한국전력공사 대구본부 전력사업처 배전운영부 차장

류성훈 한국전력공사 대구본부 전력사업처 배전운영부 차장
류성훈 한국전력공사 대구본부 전력사업처 배전운영부 차장

세계 주요국 전력 품질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연간 정전 시간은 '8.9분'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짧다. 2위인 독일은 12.8분(1.5배), 일본은 22분(2.5배)가량이며, 이탈리아는 10.8배인 96분에 달할 정도로 격차가 크다. 우리나라는 국가 경제발전과 국민 생활수준 향상에 따라 정전 없는 고품질의 전력 공급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한국전력은 수년간 정전 시간 10분 미만이라는 수치로 부응했다. 하지만 대가 없는 결실은 없었다. 정전 시간을 낮추기 위해 도입한 직접 활선, 무정전 작업은 감전 사고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한전 하청업체 소속 직원 A씨가 신축 현장 전기 연결 작업을 하던 중 특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한전은 1월 9일 '안전사고 근절을 위한 특별대책'을 발표했고, 특히 감전 사고 방지를 위해 ▷직접 활선 즉시 퇴출 ▷정전 후 작업 확대 ▷간접 활선 지속 확대를 강조했다. 당장의 편의가 아닌 안전한 공사를 더 우선시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지난 4월 25일 밤 11시 42분쯤 대구 남구 이천동에서 정전이 발생했고, 당시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다. 한전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긴급 휴전 등 안전조치를 시행했고, 20여 분 만에 777가구에 전력 공급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를 뚫고 추가적인 작업을 해야만 정전 복구가 가능한 43가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전은 정전 고객의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안전한 복구작업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대책 회의를 진행했다.

작업자의 안전을 고려하여 휴전작업을 우선 검토했으나 이 경우 추가적인 광역 정전이 불가피했다. 만약 임시 비상발전기차를 동원한다면 추가 정전은 막을 수 있지만 야간과 강우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작업자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한전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고객 불편과 작업자의 안전 사이에서 작업자의 안전을 택했고, '안전 요건이 충족되는 즉시 작업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정전 고객에게는 해당 결정에 대해 안내했고, 밤새 뜬눈으로 기상 상황과 정전 고객의 특이 사항을 모니터링했다. 그리고 오전 6시쯤 긴 비가 그친 후 작업을 즉각 시행해 2시간여 만에 무사히 전기 공급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번 정전으로 43가구의 고객들은 장시간 불편함을 겪어야만 했고, 그러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불편함이 결코 묻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 현장에 서야만 했다.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 속에서 과연 어떤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한전의 '안전 최우선'이라는 원칙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제2의 A씨가 될 수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요 선진국에서 인명 피해와 사망률에 대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안전사고 사망률이 가장 낮은 분야는 전력산업 분야라고 한다. 이는 전기작업이 엄격한 규제하에서 전력 공급을 끊은 휴전 상태로 시행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국민 개개인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정전에 대비해 자체 예비 전원공급기를 구비하는 등 국민의 이해와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국이 전력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력 품질 1등'이란 결과도 중요하지만, '인명 존중'이라는 근본을 우선시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전에 대한 범국민적인 공감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진정한 전력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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