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경규의 행복학교] 화낼 시간이 어디 있어, 웃을 시간도 부족한데 …

최경규

세상이 진보함에 따라 인간의 지식과 신체의 발육 측면만을 보면 과거와는 확연한 차이를 가진다. 모르는 한자가 있어서 옥편을 찾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곁에 있던 손자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금세 가르쳐 드리기도 하고, 중학생이 된 아들보다 아버지의 모습이 더 작아 보일 때, 가시적으로 보이는 성장 속도에 사서삼경이나 논어의 이야기를 꺼내면 왠지 구석기(舊石器)적 사고를 하는 노인네라는 이야기를 할 듯하다.

발전하는 세상 가운데 살면서 지식과 신체의 양적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루는 질적 성장, 즉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본다.

이 물음에 대하여 "삶에서 배우는 지혜"를 오늘 말하고 싶다. 아침이면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나는 집을 나설 때 항상 이어폰을 준비한다. 햇살 좋은 날이면 걸으며 음악을 듣기도 하고, 보슬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쓰고 강의도 듣는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장점에 이 시간이 즐겁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함께 하던 이어폰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의 인연이 다한 물건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의 찾는 노력을 뒤로 한 채, 아쉬움을 안고 공원을 향한다.

◆길 위의 철학자를 만나다

익숙함에 젖어있다는 것은 삶이란 패턴 속에 같이 숨 쉬었다는 것인가? 늘 들으며 걷던 음악 소리가 들리질 않으니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로부터 30분이 흘렀을까? 작은 음악 소리에도 충분히 보였을 법도 한 많은 것들. 길가에 핀 장미꽃과 새들의 노랫소리, 햇살 아래 비치는 여러 풍경이 비로소 하나둘씩 내 눈에 맺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걷는 사람들, 공원의 이른 시간, 걷는 사람의 연령대는 70대 전후의 어르신들이었고, 그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다. 그들은 오늘 내가 처음으로 느낀 햇살을 온전히 즐기기도 하고, 다른 분들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앞서 걷던 두 할머니의 이야기가 조용한 공원, 산들바람을 타고 내 귓가에 전해온다. "내가 말이지, 예전에는 참 성격이 좋다고 생각했었어, 근데 그게 절대 좋은 성격이 아니었던 거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서 바로 잡으려 했어, 때로는 사람들과 언쟁을 하기도 했고, 그 때문에 다소 소원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 근데 말이야, 이제 나이가 70줄에 들어서니 이런 생각이 들어, 화낼 시간이 어디 있어, 웃을 시간도 부족한데 말이지"

이 말을 들은 나는 길 위의 철학자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싶었던지 나의 발걸음은 조용히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 젊을 때는 남의 말을 듣기도 싫었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으면 싸움닭처럼 달려들기도 했지, 그것이 나를 바로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말이지"

논어에서는 나이 60이면 이순(耳順)이라 하여, 남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귀에 거슬림이 없다고 했고, 70이면 고희(古稀)라고 하여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순리에 어긋남이 없다 했다. 지천명(知天命)을 알아가는 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순과 고희라는 세월의 길을 착실하게 살아온 지혜로운 사람들의 대화로 들렸다.

심리학자 역시도 자신의 심리를 쉽게 조절하지 못한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회복 탄력성이 빠르고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지식이 있어 평정심을 빨리 찾을 뿐이다. 그러기에 일반 사람들이 작은 반성들로 어제를 보내고, 내일은 오늘 같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화를 내는 시간도 소중한 내 남은 생의 한 부분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를 낸다고 해서 그 시간만큼 더 삶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용기 필요

얼마 전 가깝다고 느끼며 지내는 사람이 기대 이하의 행동으로 그동안의 신뢰가 무너진 적이 있었다. 삶이 어려워 그랬다고 치부하기에는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화를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웃고 있다고 해서 친절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좇는 잘못된 행동이다. 정말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중간에 말이라도 했어야만 한다.

평정심이 필요했던 시간이 지나자 더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곁에 둔 나의 안목과 성격이 문제였다. '좋은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 역시도 내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으로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때로는 우유부단하게 이어가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순과 고희의 세월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적들이 있는 전쟁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고 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자신을 두어야만 한다. 그래야 남들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고, 자신의 어떠한 행동도 도에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쓰레기통만 정기적으로 비워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람 관계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농담 삼아 강연 중에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비 오는 날 전봇대에 매일 올라가는 용기가 있지 않은 이상 말이지요'라고, 다시 말해 부정적인 사람은 늘 부정적이라 곁에 두면 웃을 확률보다 화를 낼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비록 자신은 웃을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화낼 일을 줄인다고 해서 반드시 웃을 일이 비례적으로 많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웃음을 만들면 큰 웃음으로 전염될 확률은 상대적으로 높다. 삶에서 작은 웃음을 만들 환경을 만드는 것은 바로 누구의 몫도 탓도 아니다. 오늘 당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산 정상에서 야호를 외치면 야호라는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온다. 아무리 산세가 좋다고 해서 욕을 하는데 메아리가 야호로 들릴 거라는 착각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를 좋은 방향으로 자극해 줄 수 있는 사람, 늘 공부하고 배우려는 사람들 속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전쟁터에서 혼자 이어폰을 꽂고 클레식을 듣는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는 화낼 이유를 줄일 수 있는 환경을 자신에게 선물하여 보자, 화낼 시간이 어디 있어? 웃을 시간도 없는데...

최경규

행복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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