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청와대를 다녀왔다. 새 대통령이 취임식과 함께 '청와대, 국민 품으로'의 슬로건 아래 개방되었다. 현대 역사와 정치의 중심에서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변환하는 현장으로 두근거리며 달려갔다. 청와대를 다녀온 소감을 몇 회 쓰려 한다.
언니는 성북경찰서의 형사인 형부와 결혼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으로 형부는 초비상이었다. 어린 나는 가족의 비극을 예상하지도 실감하지도 못했다. 그는 밤낮없이 무장공비를 추적하다 수락산 현장에서 쓰러졌다. 그는 경찰병원으로 이송돼 일주일이 지나서 돌아가셨다.
신문 기자들의 후레쉬를 받는 사람은 소복 입은 27세의 언니였다. 그녀는 두 살 된 딸과 백 일된 아들을 안고 청천벽력같은 상황에 하얗게 질린 채 석고 부조처럼 앉아있었다. 대통령은 금일봉을 내렸다. 그뿐이었다. 언니는 청와대의 위로 전화를 받은 후 기차를 타고 친정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의 완행열차는 느렸다/ 빈 젖을 빨며 칭얼대는 아들과/ 눈만 깜빡이는 두 돌 배기 딸/ 철컥, 철컥, 철컥, 철컥거리는 기차 소리에 찍히는/ 언니 가계의 흑백사진/ 친정이 가까워질수록 언니는 카메라 렌즈를 닦느라 느렸다./ 다가올 기나긴 세월이 허기져서 느렸다.// 흑백사진의 인화지 속에서/혼자 주춤거리는 그림자로 살아낸/ 언니 (안윤하 '여자의 삶은 소설책 열두 권이다 5' 일부)
국가는 가난해서 보상의 조건도 까다로웠다. 현장에서 쓰러진 순직임에도 '입원 일주일 지난 후 사망'이므로 국가유공자는 될 수 없다고 언니를 빈손으로 밀어냈다. 시어른은 전 재산과 부조금을 압수하고 '재혼하라'며 그녀를 밀어냈다. 빈 몸으로 쫓겨나온 언니는 자식을 데리고 극빈의 위협 속에서 억울한 세월을 시퍼렇게 살아내었다.
국가보훈처에 따져 물을 때마다 증빙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다. 증빙서류는 보존기한 지나 폐기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찾은 뉴스 기사를 근거로 삼아 끈질기게 찾아 나서자 서울경찰청 폐창고 기록부에서 삭고 헤진 '순직'의 두 글자를 찾아내었다. 백 일경의 갓난쟁이가 30세 되던 때 형부는 명예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보훈처는 소급적용은 불가하다고 했다.
국가는 대통령을 지키다 순직한 경찰 유족의 방치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론기관의 보존된 기사가 아니었으면 형부는 영원히 국가의 무관심 속에 묻힐 뻔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국민을 보훈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팔순이 넘어, 기억을 잃어가는 언니는 "서른의 나는 참 가여웠다"며 고장난 녹음기처럼 소회를 되풀이 한다.
천안함 유족들의 슬픔에 깊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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