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보릿고개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보리가 익는다. 새파랗던 빛깔이 누렇게 변하고 연하던 까락이 바늘처럼 억세졌다. 온 산천이 푸르고 눈부시건만 보리밭만은 누렇게 물든다. 보리농사는 가물어야 풍년 든다더니, 올해 가물긴 가물었나 보다. 알이 제법 실하고 잘 영글었다.

그러고 보니 소만이 지났다. 만물이 들녘에 가득 들어찬다는 소만은,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로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들어있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사월령'에는 '4월이라 맹하(초여름)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했다. 입하는 '보리가 익을 무렵'이라는 뜻으로 '맥추(麥秋)'라고도 한다. 소만이 지나면서 햇볕은 한층 더 강해진다. 지천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고 시원해진다. 무엇이든 씨만 뿌리면 잘 자라는 시기이므로 농부의 머릿속에는 일 년 농사 스케줄이 꽉 들어찬다.

옛날에는 이 무렵을 보릿고개라 했다. 여름 보리마저 여물지 않은 시기였다. 농사 준비로 노동량이 곱절로 늘어나지만, 가을에 거둔 곡식은 바닥나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버거웠다.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뜨거나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칡뿌리, 소나무 껍질, 풀죽 등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다. 배도 부르지 않았을뿐더러 근기조차 없어 금방 허기졌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시골에는 걸식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리에 찬 숟가락 소리가 삽짝에서부터 짤랑짤랑 나면 어머니는 밥을 덜어 주셨다. 그러면 마당 구석에 자리 잡고 돌아앉아 허겁지겁 먹고 갔다. 앞집 상 할매는 풋보리가 익을 때면 혼잣말을 하셨다. 풋보리를 불에 그슬려 밤이슬을 맞혀 먹으면 속병이 없어진다는 것과, 앞산 어디쯤 먹는 흙이 나는 구덩이가 있다고 했다. 할매 말을 못 믿어 찾아 나섰던 앞산엔 정말 흰 찰흙이 나는 구덩이가 있었다. 호기심에 흙덩이를 혀끝으로 핥았다. 생전 처음 맛보는 흙은 밍밍하면서도 특유의 맛이 났다.

소만이 지나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 햇볕이 억세지고, 풀이 무섭도록 무성해진다. 논을 갈고 물을 대 모심기를 준비한다. 매끈하게 정돈된 들에 하늘이 먼저 내려앉는다. 곧 저 들엔 연둣빛 모가 가득 심어질 테고 바람과 햇살과 햇볕과 농부의 손길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건강하게 키울 것이다.

보릿고개는 옛말이 되었다. 세상에 먹을 것이 흔해졌다. 먹다 남은 음식들은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먹을 만큼만 하거라. 쌀 한 톨도 허투루 버리지 말거라. 음식 버리면 죄 받는다." 배곯고 살아본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의 잔소리 같은 당부가 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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