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2월, 진눈깨비 날리는 서울대 도서관 앞에서 한 학생이 경찰을 따돌리며 홀로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구경만 하는 학생들. 박정희 정권이 유신 독재의 추악상을 감추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로비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범영! 미국 의회 청문회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박동선 스캔들이 그 4학년 선배의 시위로 국내에도 알려져 박 정권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숨죽이던 사람들이 그때부터 기지개를 켰고,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부마사태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김재규의 총성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이범영, 그가 겨울 교정에서 외롭게 외치다 잡혀간 지 3년 만이었다.
그리고 44년이 흘렀다.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대한민국, 입법·행정은 물론 지방 권력까지 장악해 독주만 하는 문재인 정권, 사법부까지 흔들어대는 권력의 오만에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힘없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그 선배가 떠올랐다. 학생일 뿐인 그가 세상을 바꾸는 물꼬를 트지 않았던가.
3년 전 조국 사태로 고군분투하던 윤석열 검찰총장의 용기를 보며 그를 만났다. 다행히 그는 지혜로운 검사로 보였다. "윤 총장! 지금 이 어두움을 걷어내면 국민들이 대통령으로 불러낼 겁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1년 후 그는 유력한 대선 후보로 등장했다. 그런데 벌써 대통령이라도 다 된 듯 걸음걸이며 말투가 지나쳐 보였다. 국민들의 성원이 지속될까. 그의 부풀어 오른 자신감에서 바람을 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력이든 학식이든 인품이든 윤석열에게 뒤지지 않을 인물을 찾기로 했다. 안철수가 떠올랐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더니 후배가 자리를 마련했다. 서울시장 경선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해 위축돼 있던 그를 만나자마자 나는 이야기했다. "윤석열을 위해서도 이번 대선에 꼭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유력한 야당 후보라도 견제할 후보가 있으면 자세를 낮추게 되고 그래야만 국민들의 마음도 떠나지 않습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의 겸손한 태도에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려면 대통령 중심의 권력 남용이 사라져야 합니다. 단일화로 공동정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대통령에 출마한 안철수는 경선을 제안했다. 윤석열은 단일화 무산의 책임을 안철수에게 돌리고 자강론으로 돌아섰다. 중도의 지지 없이 정권을 잡겠다는 그 무모한 계획에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권교체의 키는 윤석열이 아니라 안철수에게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3월 1일 아침, 안철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화 폭탄으로 통화 중 신호만 계속 들려왔다. 곧 사전투표가 시작되지 않는가. 애가 탔다. 아! 이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이란 말인가. 오후에 다시 전화를 들었다. 안 후보가 받는 게 아닌가.
그는 단일화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약속을 지킨 정치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국무총리니 경기지사니 들이대며 거래하는 듯한 협상 태도에도 몹시 자존심 상해 있었다. 그는 자리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사람인데…. 국민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아픔이 다가와 "나도 밤늦게 글을 쓰고 있으면 지나가던 친구들이 '야, 이 밤중까지 돈 벌고 있냐?' 그럴 때 몹시 마음이 아프다"고 했더니 그도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30여 분이 지나서야 나는 단일화 문제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또 철수했다고 비아냥댈 겁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철수하는 게 맞지요." 그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그럼 내일 마지막 토론회 때 단일화 제안하지요." 나는 뛸 듯이 기뻤다. 3월 3일 새벽 대망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윤석열은 0.73%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역사는 위인만이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한 학생도, 한 시민도 역사의 물꼬는 틀 수 있다. 거대한 문도 두드리면 활짝 열린다는 사실을 나는 이범영을 통해, 내 경험을 통해 분명히 체험했다. 어쩌면 비밀로 해야 좋을지도 모를 일을 밝히는 것은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수천, 수만 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위기가 다가올 때 힘이 있건 없건 선한 뜻만 가지면 누구라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진실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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